롱테이크의 신화에 던지는 물음: 무엇을 보고 있는가?
2026

박규재, 일환
*제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9월 13일 일요일 16시 30분, 제임스 베닝의 <열 개의 하늘> 상영 후 박규재, 일환의 토크가 진행될 예정이다. 본 대화는 토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작가가 나눈 대화를 읽기 좋게 옮긴 것이다.




박규재
    유튜브에서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라는 제목으로 8시간짜리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며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에릭 도링어가 2012년에 촬영한 <Empire (after Andy Warhol)>의 분할 업로드 영상들을 연결한 것이다. (제럴린 헉슬리 (앤디 워홀 미술관) 측 주장에 의해 해적판 논란이 있었던) Raro Video가 출판한 DVD에는 <엠파이어>의 60분 발췌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엠파이어’를 두고도 진위 여부에 대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엠파이어>는 1,200피트짜리 16mm 필름 롤로 촬영되었으며, 한 롤은 의도된 상영 속도인 16fps로 상영할 경우 계산상 50분에 해당한다. 각 릴의 끝에는 필름 롤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빛에 노출되어 생긴 과노출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은 필름 교체와 이에 따른 시간의 간극을 숨기지 않는 작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엠파이어>는 하나의 연속된 8시간짜리 고정 롱테이크가 아니라, 약 50분 단위의 시간 마디들이 연결되어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 50분이라는 시간과 앞서 언급한 DVD 발췌본의 60분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어색함이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발췌한 것이길래 60분이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부터 두 개의 가설을 제안할 수 있다. <엠파이어>는 열 개의 릴로 구성된 작업인데, 한밤중의 시간대를 담은 릴 중 하나를 24fps나 25fps로 디지털화한 것이라는 가설이 첫 번째다. 프레임 속도 차이에 의해 분량이 30분정도로 줄어 들었고, 한 릴의 발췌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그것을 인위적으로 반복해 약 60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해당 발췌본은 필름의 스크래치와 먼지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프레임 쌍이 존재한다. [사진1]
    또 하나의 가설은 해당 발췌본 자체가 조작된 가짜라는 것이다. 한밤중의 ‘엠파이어’를 담은 정지 이미지 한 장[사진 2]을 움직이는 영상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지터링과 그레인, 누광에 의한 과노출이나 물때를 흉내 낸 효과를 잔뜩 집어넣는 방식으로 말이다. 11분 11초에 나타나는 물때[사진 3]도 어색하다. 습윤제 처리를 생략해서 생긴 건조 얼룩이라면, 왜 그 흔적이 영화 전체에서 유독 이 한 부분에만 나타나는지 의문이 든다. 그 형태 역시 자연스럽게 남은 얼룩이라기보다 물방울 이미지를 합성한 것처럼 보인다. 과노출이나 스플라이스의 흔적으로 보이는 부분[사진 4]도 이미지가 지나치게 균질하다는 점에서 어색하다. (…)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4]


일환
    떠오르는 A. L. 리스의 문장 하나. “모든 영화가 시간을 구체화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기반 예술로서의 영화라는 개념은 아방가르드의 핵심이다.” 그리고 제임스 베닝은 말한다. “미학은 실제보다 덜 정치적으로 사태를 인지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지속을 통해 쇼트에 정치적인 것을 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예술의 경우, 기계에 대한 기술적 배경지식이 감상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자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술적 제약과 도약을 인지할 수 있다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가 상호 교환되는 여러 지점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의 제약이 지속 시간의 한계를 수반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50분 길이의 쇼트 두 개로만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샤론 록하르트의 <더블 타이드>(2009)가 실은 최대 400피트(약 11분)를 촬영할 수 있는 16mm 환경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하나의 쇼트라는 연속성은 디지털 편집 과정에서 디졸브가 보여주는 마술이다. (제임스 베닝의 <루르>(2009) 마지막 쇼트가 그러한 것처럼!) 프레임을 결코 벗어나지 않고 갯벌의 촉각과 청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모델의 노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놀이가 된다. 그 이면에서 촬영되지 않은 임무의 수행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관객들은, 분명 해당 작업의 또 다른 국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닝의 <열 개의 하늘>(2004)은 10분 분량의 쇼트 10개로 구성된 영화다. (이 영화는 2003년 이라크전 발발 후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지속 역시 기계의 조건과의 긴장 속에서 구성되었다. 


박규재
    록하르트와 마찬가지로 베닝도 400피트짜리 필름을 사용해 촬영했을 것이다. <열 개의 하늘>의 한 쇼트는 10분으로, 24fps 기준으로 360피트에 해당한다. 400피트 한 롤에서 연속된 10분을 취한다면, 앞뒤를 합쳐 덜어낼 수 있는 분량은 1분 가량의 40피트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기적에 기대어 영화를 만든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카메라를 어디에 두고 언제 돌릴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뒤에 일어날 일까지 정할 수는 없다.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빛과 구름의 움직임이 어떤 뜻밖의 관계를 이루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10분에는 그 기다림과 기대가 함께 들어 있다.


일환
    이 영화가 무척 놀라운 이유는 그 기다림과 기대, 지속과 순간 사이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는 방법이 열 개의 쇼트에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 과정을 구성하는 성분은 조작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름이라는 형체, 그리고 프레임과 사운드뿐이라는 점에서도. 
    베닝의 필름 후기작을 볼 때마다, 70년대 구조주의 영화들과 동일한 시기에 대지미술이 신생했던 개념적 맥락에 대해 재고해 보게 되는 것 같다… 베닝은 탐미주의적으로 대상화된 자연을 찍지 않는다. 로버트 스미스슨은 이렇게 적었다. “거소 같은 예술가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구체적인 변증법을 만들어내기보다, 경치 좋은 장소로 물러나는 쪽을 택하는 유형이다. 이런 예술가는 스스로를 도덕적 정당성으로 둘러싸고, 마치 풍경을 구원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생태학자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속물일 뿐이다. […] 진정한 예술가는 우리의 풍경 속에 깃든 모순들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다.”
    <열 개의 하늘>을 비롯한 베닝의 영화를 두고, 롱테이크의 시간성이 모더니티의 속도감에 저항한다고 평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그는 에머슨처럼 인간과 자연을 간단히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에 속한 인간이, 그 외부와 맺는 관계를 사유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쇼트 역시 기계와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의 긴장 속에서 성립한다. 이것은 탐미주의적으로 대상화된 자연 풍경을 포착하는 일과는 매우 다르다. 다시 스미스슨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농부든, 광부든, 예술가든, 대지에 대한 태도는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자연의 일부로 자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박규재
    앞서 내가 <엠파이어>를 거론한 것은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롱테이크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화면의 크기와 소리, 중단되지 않는 관람의 시간도 우리가 무엇을 지각하는지를 결정한다. 제임스 베닝의 <열 개의 하늘>을 핸드폰이나 대학 강의실의 협소한 디스플레이로 보았다고 해서, 그때의 경험이 그 영화가 줄 수 있는 경험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완벽한 상영 환경에서의 경험만이 진짜이고, 그 밖의 경험은 모두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관람을 통해서도 그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 가늠해 볼 수 있으며, 그때 실제로 보고 들은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가늠한 것 사이의 차이를 의식할 필요가 있다.


일환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은 실험영화의 관객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작품 앞에서 보내는 자신의 시간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구태여 의심하지 않는 관객이라는 뜻과 동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