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인터뷰
1987

김이석 옮김

인터뷰어: 자크 오몽, 안-마리 포
인터뷰이: 장-마리 스트로브, 다니엘 위예
* 이 인터뷰는 La Mort D’Empedocle: Un film de Jean-Marie Straub et Daniele Huillet (À Bruit Secret, 1987)에 실린 자크 오몽 Jacques Aumont과 안 마리 포 Anne-Marie Faux가 한 인터뷰 “Entretien avec Jean-Marie Straub et Daniele Huillet”를 옮긴 것이다.  

번역된 인터뷰를 공개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김이석 교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예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다.”
 — 세잔


자크 오몽: 먼저 다소 비관적인, 어쩌면 잘못된 사실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제가 소비자, 비평가 또 나이든 시네필의 자격으로 영화와 일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 지 20여 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저는 일종의 비극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 감정이란 젊은 세대가 (저는 학교에서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더 이상 영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이제는 내 세대의 사람들 하고만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과 더 이상 새로운 영화들을 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마리 포: 다른 방식으로 영화에 종사하면서 저는 내가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우연히 〈화해 불가〉를 어제 보았는데, 저는 이것이 당신들의 두 번째 영화라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아주 강력하게 영화적인 상태로 되돌려졌습니다. 왜 더 이상 이런 영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요?​

장-마리 스트로브: 당시에도 이미 가능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와 비슷한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정말 더 이상 가능하지 않지요. 압박은 여전히 더 강해졌는데, 저항은 여전히 덜 강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무슨 말을 하겠어요?​

다니엘 위예: 내가 젊은 세대들의 영화를 보면서 염려하는 점은 영화를 통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만 보인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그것이 내게는 경제적 억압의 역사보다 더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독살처럼 훨씬 미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로브: 그건 스스로 음독을 하는 것이지요.

위예: 그것은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에요. 이미 고다르의 경우처럼 그런 경우가 있었지요. 하지만 고다르는 대단히 강했기 때문에 이 시네필적인 측면이 해소될 수 있었지요.

: 레오스 카락스 같은 경우도 바로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데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해소시키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오몽
: 카락스에게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제외하고 나면, 그것은 고다르일 텐데요. 그런데 고다르가 참조한 것은 존 포드와 로셀리니였습니다.​

스트로브
: 그리고 고다르는 영화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해소시키는 데 결코 어려움을 겪지 않았어요. 그는 리얼리티에 의해 정복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었지요. 바로 리얼리티가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해소시켰는데요, 그. 이유는 고다르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카락스에 대해서는 얘기 하지 않겠어요. 그 감독의 영화를 보지 못했거든요.

​위예
: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많은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트로브
: 그렇다면 왜 뤽 물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건가요? 어쨌든 그는 고다르 이후로 가장 중요한 시네아스트인데요. 그 감독에 대해 계속 말해야 합니다.

​위예
: 맞아요. 하지만 물레는 여전히 레지스탕스 세대입니다.

스트로브
: 낡은 반동적인 어떤 것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영화를 만듭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출발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어요. 여전히 나는 이 늙은 파시스트 사무엘 풀러를 좋아해요.
 우리는 제로에서 출발할 수도 없고 이미 이루어진 것을 무시할 수도 없어요. 그건 분명히 다른 측면이에요. 만일 우리가 미국의 한 영화 학교를 돌아본다고 하면, 우리는 선생들이 채플린이나 그리피스의 영화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지요.

​위예
:  그게 어디나 그런 건 아니에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스트로브
:  우리는 그 선생들이 본 영화라는 게 고작, 내가 스탠 브래키지의 전 작품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최근작을 말하는 것인데. 아무튼 이런 무지함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다고 생각하곤 하죠. 그리고는 결국 필름과 붓, 기계를 가지고 스크린을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러고서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곤 하지요. 이것이 한 편의 영화로부터 출발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것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대단히 끔찍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이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타비아니나 로지, 앙겔로풀로스는 오늘날 영화를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당신들을 슬프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것은 바보같고 위선적인 그런 끔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그것이 영화 속의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린 글쓰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사에 의해서 흥미를 느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수사가 영화의 주제, 즉 그 내용과 형식이 되어버립니다.
 내게 있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감정과, 저항과 느낌과 질문 그리고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영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만든 다음에 우린 우리가 만들어낸 대상물이 완전히 전통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베를린에서 첫 공식 상영에서 말했을 때, 〈화해 불가〉는 전통적인 작품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때 그 사실에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영화를 만든다faire du cinema’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예
: 우리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영화를 구축하는 동안 질문을 던지고자 했습니다. 단지 느낌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질문들을.

​스트로브
: 어떤 음악가, 어떤 소설가, 어떤 화가 혹은 캔버스를 뭉개는 행위일지라도 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왜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한단 말인가요? 그러 나, 그것, 그것이 영화라는 것은 여전히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구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쇤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제가 10분짜리 실내악 혹은 두 시간짜리 교향곡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하 는 것이지 10분짜리 실내악이나 두 시간짜리 교향곡을 위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거나 그 반대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위예
: 그 ‘반대의 경우’'는 좀 드문 경우이죠!

오몽
: 그러나 당신은 이 문제가 진정으로 사람들이 영화로부터 출발하는 그것이라고 확신하는 건가요?

스트로브
: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경우입니다. 그들은 전통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 느낌이란, 좀 거창한 표현이긴 하지만, 삶이나 실제적인 느낌과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영화에서 온 느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스트로하임이나 그리피스, 미조구치 혹은 르누와르의 영화에 대한 느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예
: 영화를 본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요. 따라서 시네필(영화 애호)이란 언제나 그리고 어쨌든 90% 정도는 타인의 영화 속에서 찌꺼기나 다름없는 것들을 모으는 것이지요. 그 나머지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거든요.

스트로브
: 사실상 영화를 볼 수 있게 되기까지, 즉 스크린 위에 나의 판타즘을 투사시키지 않게끔 되기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오몽
: 늘 그런 건 아닙니다. 작품이 뭔가 이미 다 말해버렸다는 인상을 받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좀 나은 경우는 그 영화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이구요…

스트로브
: 그렇지요. 그러나 로지의 영화 같은 시시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은 우리가 역으로 말한 것이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지요. 나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도 역시 어렵지요.​

오몽
: 꼭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네요. 대단히 말하기 쉬운 작품들 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작품들이 글쓰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손길을 뻗치면서, ‘이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보세요’라고 말하며 흘러갑니다. 많은 작품들이 그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처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비평이라는 것이 성장해 나갑니다.

​포
: 그건 장 나르보니가 〈오통〉에 관한 글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영화는 비평을 좌절시킨다는 것이죠. 영화가 비평을 주제, 스타일, 특히 스타일같이 비평이 습관적으로 채택하는 출발점을 그로부터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오몽
: 시시한 영화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평균적인 영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스콜세지의 영화를 예로 들면, 그 안에는 우리가 스콜세지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얼굴의 중앙에 있는 코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거기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스트로브
: 정확하게 말하면, 르누아르나 스트로하임 등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달리 부르는 그런 스타일, 즉 “이건 그 사람 자체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르누아르가 이룩한 것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르누아르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길로 약간이나마 이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 그 자체’ 외에는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몽
: 그러나 당신들의 영화의 경우, 그 작품들이 르누아르의 작품들과 상당히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이 유사함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스트로브
: 만일 그렇다면 저는 조금 유감스럽군요.​

위예
: 당신이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막 〈화해 불가〉를 보셨을 텐데, 우린 그 영화를 오래 전에 보고 못 보았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는 이 영화가 〈엠페도클레스의 죽음〉과 비슷한가요?

오몽
: 그다지 많이는…

위예
: 저는 얼마 전에 함부르크에서 〈역사 수업〉을 다시 보았습니다. 영화학과 학생들을 위해 상영되었는데요. 처음에는 단지 상영에 문제가 없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보고 있었는데, 계속 거기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이 영화가 원래 이랬던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로마에 대한 일종의 자료인 셈인데요, 15년 전에는 아직 활기가 넘쳤던 이 도시가 지금은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이 영화는 카프카의 《아메리카》와도 닮지 않았고, 최근작과도 닮지 않았으며 이 모두가 서로 그 다지 닮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몽
: 그건 확실합니다.

​스트로브
: 그렇다면 당신의 질문은 어떤 의미인거죠?

​오몽
: ‘닮았다’라는 것이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손쉽게 당신들의 작품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린 당신들이 프레이밍하는 방법과 소리를 포착하는 방식, 배우들을 연출하는 방식들을 알아차립니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알아차릴 만하다는 것이죠.

스트로브
: 르누아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르누아르가 해낸 것은 히치콕이 해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위대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가 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히치콕이 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히치콕의 화면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반면에 르누아르의 경우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오몽
: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인데요. 오즈와 같은 시네아스트의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단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즈인지는 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위예
: 미조구치의 경우에도 우린 알아볼 수 있지요.

스트로브
: 예. 감히 말하자면 오즈가 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영역에 대해, 영화 작업과 인물과 이야기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시네아스트라면 충분히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꿈은 심지어 바보일지라도 약간의 인내심과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준비만 되어 있다면 같은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내 이상은 복잡한 영화들, 그 앞에서 우리가 “오 하느님, 이건 예술이에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이렇게 말하게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것이 베르톨루치나 타비아니, 앙겔로풀로스 등이 하고 있는 작업입니다. 오즈의 경우는 반대이지요. 오즈의 작업 이 위대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그가 해냈기 때문입니다. 미조구치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동료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 “오즈가 해 놓은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한 작업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감춰진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땅에 닿을락말락한 정도보다 더 아슬아슬한 한계인데요, 우린 미조구치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오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비록 그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비록 거기에 드러나 있더라도 말이에요.)

위예
: 결국 그게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프리츠 랑의 프레이밍을 알아볼 수 있고, 세잔의 붓질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로브
: 그러나 모든 화가들은, 그들이 진지하게 작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당시에는 세잔처럼 그리게 되곤 했을 겁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단 사람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한편, 내가 읽은 다른 동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경의는 존 포드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존 포드는 “르누아르”라고 답을 했습니다. 기자들이 다시 “그렇다면, 르느와르의 어떤 영화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포드는 “아니, 아니 전부 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이 시네아스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르누아르의 작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이것이 이 질문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오몽
: 저는 모든 진지한 화가들이 1890년대에 세잔처럼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예
: 만일 그들이 정말 세잔처럼 그림을 그렸다면…

스트로브
: … 제 생각에는, 세상이 아마도 끔찍했을 겁니다. 너무 획일화된 거죠.

오몽
: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예술사를 각 시대의 예술적 필요성에 관한 역사로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점이 걸립니다.

스트로브
: 그러나 그게 세상을 좀 슬프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만일 세잔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제가 말한 것을 했다면 제가 ‘시대’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당신이 말한 그것과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만 대단히 좋은 일이었을 겁니다. 회화의 입장에서는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요. 회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중요했던 것은 인간들이 선명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세잔 덕분에 그리고 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예술적 창작의 영역에서 얄팍한 문제 의식으로 현실을 변형시키고 예술적 주제와 창작물 사이에 자신들의 허영심을 투영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선명하게 보기 시작했고 응시를 할 수 있었으며, 사과와 탁자와 의자에 앉은 노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회화는 거기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지요. 따라서 세잔은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응시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잔의 그림을 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모든 사람들이 오즈 야스지로처럼 영화를 찍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코폴라나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영화는 날마다 우리가 경험하고, 보고 듣는 것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즈의 영화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많이,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우리들의 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바로 이 점이 현대 영화의 저주입니다. 벤더스밖에 볼 게 없다는 점이지요. 물론 벤더스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오즈를 존경하지요.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오즈에게서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이제껏 그가 찍은 것 같은 영화를 찍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즈의 작업과 〈파리, 텍사스〉 사이에는 일종의 대립적인 것만이 있습니다.

: 그가 ‘오즈처럼 찍기’를 못 하는 데는 분명히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스트로브
: 그가 그러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고, 너무 영화를 찍고 싶어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여전히 후속작을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후속작을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 이러저러한 유혹적인 매력을 가져야만 하고, 상업적인 측면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주변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위예
:  좀 단순하게 말하면, 그가 오즈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스트로브
: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삶 혹은 삶 자체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요.

위예
: 영화에는 감독 외에도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바로 이것들에 의존하고 있지요. 장인들, 테크니션들, 그리고 사회적 역사 등입니다. 우리 음향 기사인 루이 오셰의 세대 에 영화로 들어온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 출신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화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그들의 계급, 그들의 경험, 그들의 지식을 영화 속으로 가져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런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영화, 영화는 일종의 마피아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기술자의 아들이 기술자가 되고, 배우의 딸이 배우가 되고 그리고 이것은 환상적인 에너지의 쇠퇴를 설명해 줍니다.

오몽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실 이덱이나 페미스의 학생 명단은 꽤 흥미롭습니다. 그걸 살피다 보면 영화계 사람이나 이름난 지식인 집안의 이름이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예
: 우리는 그걸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하곤 합니다. 젊은 테크니션들은 대개 아주 친절하고 상대적으로 감독에 비해 덜 까다롭습니다. 그래도 지적인 차원이나 경험의 차원에서 쇠퇴가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건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스트로브
:  그리고 너무 허영심이 많습니다. 거의 허영심밖에 없는 셈이지요. 야심이 없습니다

위예
: 그러나 야심이라는 것도 역시 사회적인 사실입니다. 하층 계급 출신은 출세하려는 야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스트로브
:  라신은 코르네이유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지요. 그리고 라신이 큰 성공을 거둔 이후에 코르네이유는 라신이 해 놓은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구요.

위예
:  영화 애호라는 것 역시 야심의 결여입니다.​

스트로브
:  히치콕이나 프리츠 랑,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내려는 야심의 문제로 귀결되곤 합니다. 또는 르누아르가 말한 것처럼 조금 더 왼쪽으로 혹은 조금 더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결코 자신의 허영심에 먹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자존심과 야심이지 허영심이 아닙니다.

오몽
: 포드나 혹스, 히치콕 혹은 랑이나 르느와르의 경우에 그들이 다른 시네아스트들과 관계 속에서 작업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다른 이들을 능가하거나 혹은 확장시키려고 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제 생각에는 바로 고다르가 시네아스트들이 서로 간에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거의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사람이 아닌가 보입니다. (그리고 고다르는 자신의 영역에서 유일한 방법론을 찾고 이 방법론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예
:  그렇습니다. 우리가 랑이나 포드의 인터뷰를 볼 때면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가끔 우리는 그들이 찾아낸 해답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스트로브
: 나는 고다르나 물레와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위예
: 그러나 빔 벤더스의 인터뷰를 읽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이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는데요, 거기에는 당신이 질문에 답할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겁니다.

스트로브
: 요즘 영화 감독들의 인터뷰를 보면 루이 세갱이 말한대로 그 속에는 그들의 허영심만이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늘 그들의 대화 상대인 비평에 대해 ‘앞서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 세대의 경우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경향이란 “응, 그래. 그건 괜찮군. 그리고 이건 좀 더 낫군” 이런 식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질문이란 던져지지 않았지요.
 〈전갈좌〉가 나온 이후 행해진 타비아니 형제의 첫 번째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결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오토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종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미친 짓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대화를 지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베토벤도 존 포드도 결코 대가들에 필적하지 못했습니다.

오몽
: 제가 보기에 어떤 징후로 보이는 것은 시네아스트들이 회화사의 위대한 형상들 속에서 자신들의 ‘대가’의 모델을 취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그리고 그걸 털어 놓건 아니건 간에, 스스로를 화가(위대한 화가 혹은 선호하는 화가)로 취급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스트로브
: “베르메르의 것과 같은 빛을 원합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이야기 말고는 어떤 윤곽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떤 시네아스트도 그런 조건에서 일할 수는 없습니다. 빛, 그건 우리에게 있으며 당신들에게 주어졌고, 또 회화를 모방하기 위해 그걸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영화는 출발부터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 텍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더 이상 호퍼나 지오토를 닮기를 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적인 차원에서도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있는 촬영 기사가 있다면, 그를 해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것이며, 빛은 그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런 것일 것이며, 프레이밍에 의해 그 안에서 지나가고 우린 그것을 구축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위예
: 스트로브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촬영하는 동안 끊임없이 베르타 시치오의 말을 반복하곤 했지요. “우리가 가진 것은 가진 것이고,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스트로브
: 끊임없이 회화를 참고하려는 것은 참 끔찍한 일입니다. 파스칼 보니체의 글조차도 저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보니체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요.)

오몽
: 끔찍하다는 건 좀 과장된 게 아닌가요?

스트로브
: 그러나 그래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계속해서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나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더구나 회화만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위예
: 15년 전쯤에 미국에서 출판된 〈탐욕〉에 관한 책을 우연히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꼈는데요, 거기 실린 사진을 보면서 그 영화에는 회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엇인가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트로브
:  스트로하임의 영화는 사진적이었습니다. 사진적, 바로 그것이었죠. 만일 거기서, 보니체가 했던 것처럼 나도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보려고 한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작업은 스트로하임의 영화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별 볼일 없는 영화를 다룰 때에 그런 종류 의 작업을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 요소들을 좀 더 낫게 만들면서 말입니다.

오몽
: 왜 그렇죠? 저는 위대한 시네아스트들도 그렇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어 고다르로부터 시작해서.

스트로브
: 하지만 다르는 좀 다릅니다. 어느 날 고다르가 사극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때에, 고다르였기 때문에 그는 그걸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고, 이미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모델을 만들어 내고 그림들을 보았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어쨌건 고다르는 진지한 사람입니다.

오몽
: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작품에서 드러나는 ‘회화성’이 조악함의 표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악하다는 것은 카발리에가 〈테레즈〉의 배경으로 ‘마네 스타일’의 초벌 작업을 붓질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건 임의적인 것이고, 멋지고, 교양 있어 보이려는 것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화란 단순히 이미지이고 또 회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 이미지들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이런 연관 관계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스트로브
: 그 이유를 설명드리지요. 저는 작업을 할 때에 백지 상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관습들과 우리가 본 모든 영화들에도 불구하고 제로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사나 영화사 혹은 음악 또는 제가 잘 모르는 어떤 것들이 영화 속에 후천적으로 침입하고 난입해 들어올 때, 그것들은 비로소 흥미로운 것이 되는 것이지, 결코 그것에서 출발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촬영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떠났을 때, 다니엘은 자기 라디오를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두고 가자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아직 저를 좀 원망하고 있는데요, 카세트를 베르농에서 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다니엘이 음악을 듣고 있을 때에 저는 떠났습니다. 일할 때에는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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