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들: 페터 네슬러와의 대화
2012

일환 옮김

인터뷰어: 마르틴 그렌베르거,  스테판 람스테트
인터뷰이: 페터 네슬러
흔적들: 페터 네슬러와의 대화
Traces: A Conversation with Peter Nestler

테이트 모던과 독일문화원이 공동 주최하여, 영미권 최초의 페터 네슬러 대규모 회고전이 11월 10일부터 17일까지 런던에서 진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제 DOK라이프치히 또한 네슬러의 영화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였으며, 아프졸루트메딘은 네슬러의 영화들을 수록한 DVD 박스세트를 출시했다. 이 인터뷰는 마르틴 그렌베르거와 스테판 람스테트가 진행한 것이다. 해당 글은 『월든(Magasinet Walden)』에 실린 원문 중 일부이며, 스테판 람스테트와 커트 워커에 의해 영역되어 게재되었다.

이 인터뷰를 번역하여 공개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마르틴 그렌베르거와 스테판 람스테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이 행사에 아낌없는 성원과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의 말을 덧붙입니다. 
We would like to thank Martin Grennberger and Stefan Ramstedt for allowing this conversation to be translated and shared publicly. We also appreciate their support and help with this event.


마르틴 그렌베르거: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 하르트무트 비톰스키는 당신의 주제적 접근과 이념적 문제의식이 1950년대에 형성된 태도의 산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반파시즘에 입각한 노선 그리고 기능적 비판 태도를 확립하려는 입장을 말합니다. 또한, 당신이 당대에 지배적이라고 느꼈던 매우 특정한 형태의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뜻합니다. 50년대에 대해, 연극과 문학의 만남에 대해, 초창기에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들고, 〈수문에서〉(1962)로 이끈 경험들에 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페터 네슬러: 1955년, 18살이던 저는 바다로 향했습니다.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본 것들은, 저를 성장시켰고, 새로운 맥락을 발견할 수 있게끔 해주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아르벤스 정권이 전복된 직후였고, 사람들은 미국에 공격성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처음 물어본 것은 제가 ‘양키’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유럽에서 왔다고 말하니, 문제는 없었습니다. 저는 성찰하기 시작했고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우리 일행이 한 독일인 농부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가 뉴스에서 독일군이 다시 행진하는 모습을 보았다며, 그것이 질서 있고, 반듯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망명한 나치였고, 이러한 경험들은 저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저는 1958-59년부터 뮌헨에서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저는 그곳의 미술학교를 다녔고, 거기서 영화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첫 영화를 함께 만든 쿠르트 울리히도, 그렇게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며 그는 영화·텔레비전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하우에 갔는데, 그곳은 ‘기념비’ 공간이 아니었고, 전 수용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막사에서는 이주민들과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고,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작 보조금을 신청했지만,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영화에 관해 떠올린 첫 번째 아이디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나치 시대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렌베르거: 문학을 통해서 다뤘던 것인가요? 당신이 당대의 다른 독일 청년들과 공유했던 것인가요?

네슬러: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죠. 학교에서는 그것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나치 시대에서 끝났습니다. 식당에 앉으면 SS였을지도 모르는 늙은 군인들이, 어떻게 숲에서 나오는 러시아군을 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관점에서도, 전쟁의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외덴발트슈테텐〉(1964)과 〈뮐하임(루르)〉(1964)는 이러한 생각들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렌베르거: 나치 정권에 관한 가까운 독일 역사를 재고하고 파헤쳤던 작업에서, 완전히 다른 톤의 영화인 〈수문에서〉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네슬러: 〈수문에서〉는 저에게, 한 마을을 통해 독일을 비추어 보고, 저에게 영향을 준 것들을 모아둘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크리게르뎅크말(전쟁 기념물)’이 있었는데, 나치의 철십자 훈장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생각을 그들의 슈냅스로 씻어 흘려보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이미 거기에서, 당신의 60년대 작업을 관통하는 고도로 발전된 몽타주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슬러: 그렇습니다. 쿠르트 울리히와 저는 에이젠시테인의 몽타주 그리고 그가 머릿속에서 명확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촬영 전 구상을 그려두는 방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문에서〉를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쥐처럼 가난해서,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인 스트로벨과 티하프스키가 사용하고 남은 16mm 필름만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 방식을 택하는 것에 이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촬영해야 하는지 명확히 계산해야 했습니다. 뒤편에서 필름 미터 수가 표시되는 무성 아리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분필이나 목탄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할 때와 비슷합니다. 유화로 그릴 수 없을 때의 다른 방식인 것입니다.

스테판 람스테트: 이와 같은 수준의 경제적 제약이 없을 때도, 그러한 작업 방식을 계속하셨나요? 

네슬러: 〈에세이〉(1963)에서 우리는 더 많은 재료가 있었음에도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저는 이런 작업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운드와 이미지의 긴장이 형성되는데, 이것은 동시 녹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렌베르거: 당신은 종종 뮌헨 그룹과 연관되어 언급되기도 합니다. 클라우스 빌덴한, 렘케 같은 필름메이커들이 소속된 집단…

네슬러: 아뇨, 빌덴한은 함부르크 기반입니다. 뮌헨에는 루돌프 토메, 클라우스 렘케, 막스 칠만이 있었죠.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협업한 적은 없지만, 토메와 칠만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영화를 보았고, 칠만의 경우는 제 영화들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들과 접점이 없던 쿠르트 울리히와 같이 작업했습니다. 따라서 뮌헨 그룹이라고 할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문서[‘제 2의 오버하우젠 선언’(1965)]에 서명했고, 우리의 영화들은 자주 함께 상영되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외덴발트슈테텐〉은 산업화 과정에 따른 마을과 마을 주민들의 점진적인 변화 양상을 조사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네슬러: 저에게 그 영화는 독일과 독일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한 마을에 관한 초상이었습니다. 저는 〈뮐하임(루르)〉에서도 같은 것을 했습니다. 사회 전반과 발생한 사건들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독일 어디에서나 그렇듯, 외덴발트슈테텐에서도, 역사적인 것에 접근하면 항상 나치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치 시대를 끄집어내면 “자기 둥지를 쑤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영화는 직접적으로 나치 시대와 대면했기에 논쟁을 일으켰고, 영화의 형식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반동적인 평가를 들었습니다. 〈외덴발트슈테텐〉에서 저는 농부들의 발언만을 사용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저는 한 늙은 농부와 몇 주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저녁마다 맥주를 함께 마시곤 했고,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메모해 두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후 일종의 해설이 되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영화를 위해 작곡된 스코어를 작업에 사용하신 적이 있나요?

네슬러: 〈외덴발트슈테텐〉과 〈뮐하임(루르)〉에는 스코어가 있습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화면에 묘사되는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제가 ‘용접점’이라고 부르는 지점을 통하거나, 혹은 이미지와 함께 작동하는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필름메이커들이 음악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외덴발트슈테텐〉이나 〈뮐하임(루르)〉처럼 영화를 위해 작곡된 스코어가 있는 경우 마저, [음악은] 이미지에 평행적인 것,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음악으로서 인식하는 것과 당신에게 소화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렌베르거: 〈셰필드 노동자 클럽〉(1965)에서 나오는 셰필드는 저에게 뒤스부르크나 에센 같은 루르 지역의 독일 도시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당신의 초기 영화들과 연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셰필드라는 환경을 탐구하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나요?

네슬러: 이 영화는 독일 공영방송 ARD와 슈투트가르트의 SR방송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그곳의 다큐멘터리 부서 책임자였던 하인츠 후버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적은 것과 같은 주거 지역들이 셰필드에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그런 산업 도시가 영화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셰필드를 가본 적이 없었고, 잉글랜드의 해안 도시들만 가봤었습니다. 하지만 철강 산업이라는 환경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떻게 영화를 구성할 수 있을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클럽에 갔었고, 그곳이 공장 회관, 버스, 시장, 학교 등으로 뻗어나가는 일종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렌베르거: 〈셰필드 노동자 클럽〉은 지리적 맥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컷-인의 사용, 서로 다른 환경의 이미지들이 서로 대응하는 방식, 가령 술집과 음악이 산업 풍경과 만들어내는 독특한 복합성에서도 당신의 60년대 영화들과 차별화됩니다…

네슬러: 장-마리 스트로브는 이 영화에 문이 더 많다고 말했습니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닫혀 있을 수 있는 다른 제 어떤 영화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람스테트: 그것이 당신에게 문제가 될까요? 선생님의 정치적 의제를 고려할 때, 더 많은 관객을 원하시나요?

네슬러: 아뇨, 중요한 것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제가 다가간 것을 탐구하는 일입니다.

그렌베르거: 〈그리스로부터〉(1966)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그리스의 저항 운동에 대한 영화입니다.

네슬러: 이 영화는 파파도풀로스의 독재로 이어진 쿠테타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64-65년의 상황을 다룹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매우 긴장된 시기였습니다. 저는 시위를 촬영하는 한편, 독일 점령기와 독일에 대항했던 저항 운동의 흔적들, 역사적 흔적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현지 촬영 경험은 어땠나요?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작업 방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다이렉트 시네마’라고 불리는 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네슬러: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고, 영화를 만드는 흥미롭고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렌베르거: 스트로브는 이 영화를 ‘미학적-테러리즘(esthetisch-terroristisch)’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표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슬러: 글쎄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효과를 주었고, 강력한 도발이었다는 뜻이겠죠. 목소리, 노래의 파편들, 그리고 사운드가 동반되지 않는 이미지들, 이것들은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를 이루던 시대에 당연히 매우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왜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게 되었나요?

네슬러: 우리는 촬영 기간 동안 사운드를 녹음하기 시작했지만,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것들이 무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몇 통의 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처형을 앞둔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였습니다. 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담긴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나무 이미지는 해당 편지와 대응할 것을 염두에 둔 상태로 촬영되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오버하우젠에서는 이 영화를 ‘공산주의적 졸작’이라 평했습니다.

네슬러: 아뇨, 그건 영화 산업의 지면인 필름에코(Filmecho)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오버하우젠에서는 상영을 방해하려는 시도만 있었습니다. 물건들이 공중에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람스테드트: 영화를 본 특정 집단이 그랬던 것인가요?

네슬러: 아닙니다. 보통의 영화제 관객들이었습니다. 다만 늦은 상영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그리고 이 영화로 인해 독일에서의 제작 지원이 끊겼고, 당신은 더 이상 제작비를 받을 수 없게 되어, 1966년 12월 스웨덴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슬러: 저는 가족을 통해 스웨덴과 연고가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많은 사람들이 〈루르 지역에서〉(1967)가 당신의 가장 공격적인 영화들 중 하나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독일 영화 역사 연구자 에노 파탈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패배의 파노라마’라고 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보시나요?

네슬러: 아뇨, 그 영화는 제가 읽은 것, 루르 지역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알게 된 것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저항 단체의 생존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울함을 느낍니다. SA에게 폭행당한 뒤 그들이 도시를 걸어갈 때, 마주친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너무 만신창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일말의 공격성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패배와 반란, 루르 적군 그리고 저항 운동을 묘사할 뿐입니다. 또한 처형이 이뤄지는 와중에도 전단을 배포하고 신속히 도주하며 활동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렌베르거: 간과되었다고 느끼는 역사들을 찾아내고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껴 오셨나요? 이것이 당신의 영화 작업에서 체계적인 접근이 되었나요?

네슬러: 항상 그런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늘 제가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잘 알지 못했던 흔적들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북방의 모자〉(1990)에서는 독일이 퇴각할 때 모든 것이 파괴되었던 방식, 초토화 작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폭파된 콘크리트 벙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이에 대한 아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시 SVT(스웨덴 공영방송국)의 환경은 실험적이고 관대했나요?

네슬러: 네, 관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형식과 정치적 표현 모두에 있어 제한선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꽤 초창기에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1971)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네오파시즘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집시로 산다는 것〉(197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저는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방영되었고, 저는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도 이어서 진행했지만, 이 영화는 저지당했습니다. 방영 하루 전날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때 이사회가 영화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사회민주주의가 네오파시즘이 성장하도록 방치했다는 점, 그들이 여기 스톡홀름에서 부분적으로 이뤄진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의안은 연합군의 합의에 따라 파시즘을 뿌리부터 박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네오파시즘은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로 붙여진 이유입니다. 그때 채널2에는 정책 그룹이 있었고,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영화는 결국 방영될 수 없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신은 자주 하나의 대상 혹은 사물을 다뤄왔습니다. 그것은 더 큰 사회 구조나 문제들의 존재론적 복합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떤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슬러: 하지만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로셀리니가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위해 철강 산업에 관한 10부작 시리즈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저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핵무기 개발을 표현한 〈위험한 지식〉(1984)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두 가지, 생산의 역사를 통해 총체적 사회진화를 다루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산의 역사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종류의 생활 환경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제약에 시달렸는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렌베르거: 스틸 이미지 사용, 그리고 스틸 이미지와 동적 이미지 사이의 역동성, 둘 사이의 변증법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네슬러: 저는 종종 스틸 이미지로 리듬을 만들고, ‘안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막습니다. 일종의 각성입니다. 그것은 또한 구체화 혹은 리듬 감각이기도 합니다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는 스틸 이미지가 침착함을 전달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사유할 능력과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렌베르거: 저는 〈기다림〉(1985) 그리고 〈죽음과 악마〉(2009)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슬러: 〈기다림〉의 경우, 자료는 뉴스와 보고서에서 가져온 스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악마〉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오래전에 로켈스타드의 다락방에서 스틸 사진이 담긴 상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핀란드 내전 당시의 이미지들을 찾았는데, 저는 곧바로 매료되었습니다. 이후에 투옥되고 처형될 적군을 촬영한 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리크 본 로센, 네슬러의 조부]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진작가였습니다. 곰 사냥, 인디언들의 이미지는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는 30년대 초중반의 나치즘과 연루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것이 언젠가 반드시 말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제 조부의 이야기였기에, 몹시 개인적인 것이라 계속해서 밀어내왔습니다. 이 이미지들을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었는데, 그가 작성한 기사를 몇 개 더 발견한 후, 저는 즉시 이것이 환상적인 기록임을 이해했고,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촬영한 것은 짧은 장면 하나뿐입니다. 어느 날 저는 펠트(fells)가 박물관에서 정리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저는 갖고 있던 소니100 카메라를 들고 민족지 박물관에서 가서 그것을 촬영했습니다. 다음날 그 펠트들은 다시 사라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쇼카 네슬러와의 협업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그녀가 사운드를 녹음했나요? 어떻게 함께 일하셨나요?

네슬러: 제가 카메라 뒤편에 있었고, 그녀가 사운드를 녹음했습니다. 그녀는 저희가 촬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렌베르거: 두 분을 장-마리 스트로브, 다니엘 위예와 비교해 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작업 방식에 유사점이 있나요?

람스테트: 쇼카가 전체 제작 기간 동안 함께하나요? 프리-프로덕션과 편집에도 그녀가 참여하나요?

네슬러: 그녀는 촬영에는 함께하지만, 다니엘은 그들의 영화에 있어 장-마리와 동일한 참여도를 갖습니다. 촬영 과정에서는 쇼카와 다니엘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홀로 편집합니다. 그래서 장-마리와 다니엘이 함께 작업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편집 테이블에서 싸웠던 걸 생각하면…

그렌베르거: 스트로브-위예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어땠나요?

네슬러: 그들이 〈화해불가〉(1965)의 한 장면을 제가 살던 주택의 한 방에서 촬영할 예정이었기에, 저는 그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해 논의했고, 그들이 관심을 보여서 저는 뮌헨의 한 스튜디오에서 제 영화 몇 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영화가 무엇일 수 있는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저와 동일한 감각을 공유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그들이 당시에 접점을 제공해 주었나요?

네슬러: 그들은 〈뮐하임(루르)〉가 상영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미셸 들라예가 참석해서 이에 대해 기사를 썼습니다. 나중에 〈뮐하임(루르)〉는 파리에서 상영되었지만, 학생 영화 클럽이나 몇몇 작은 영화제 같은 작은 서클 안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또 스트로브를 통해 페사로 영화제의 책임자였던 아드리아노 아프라와 연락이 닿았고, 1966년쯤, 제 영화들의 작은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아마도 조금 더 이전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렌베르거: 〈시간의 옹호〉(2007)는 어떻게 구상되었나요?

네슬러: 3sat에서 〈그들의 이런 만남들〉(2006)을 방영하고 싶어했는데, 제가 도입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아마도 분량 때문이었겠죠. 저는 “좋아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쯤 다니엘에 세상을 떠났고, 저는 두 사람, 특히 그녀를 위한, 일종의 추모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