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장-마리를 위하여
페터 네슬러의 글


일환 옮김
2017년 9월 14일부터 11월 19일까지, 베를린에서 진행된 전시 《Tell it to the Stones: The Work of Daniéle Huillet and Jean-Marie Straub》를 바탕으로, 2021년 『Tell it to the Stones Encounters with the Films of Daniéle Huillet and Jean-Marie Straub』라는 제목의 대대적인 총서가 출간되었다. 해당 총서의 첫 글로 페터 네슬러가 작성한 「For Daniéle and Jean-Marie」가 테드 펜트의 영역을 거쳐 수록되었다. 본 글은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만났다(We met at an early age)”는 문장으로 시작해, 짧지 않은 시간을 거슬러 처음이라는 추억에 닿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만났다. 1958년, 장-마리와 다니엘은 파리를 떠나 처음에는 암스테르담으로, 다음에는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슈반탈러 거리의 중앙역 근처, 고층 건물 안 작은 방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가장 큰 영화 프로젝트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를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독일로 온 것이었다.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는 것을 거부한 장-마리가 투옥을 피하려는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다. (“알제리인은 내 친구들이다”라고 장-마리는 말했다.) 그의 고향인 메츠에서, 그는 일찍이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활동, 알제리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그 과정에서 프랑스 경찰은 그를 학대하기도 했었다. 1950년대 초, 장-마리는 스트라스부르, 낭시, 그리고 메츠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중요한 영화들로 구성된, 생기 넘치는 프로그램을 가진 필름 클럽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프랑스 동부에서 파리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니엘을 만났다. 이후로 몇 년 동안, 그는 아벨 강스, 장 르누아르, 자크 리베트,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촬영 현장에서 일하며 견문을 쌓았다. 그러던 중 알제리 혁명이 시작되었다.

해당 시기, 그는 이미 그의 바흐 영화를 위한 촬영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만프레트 블랑크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초상 영화, 〈시선의 끈기〉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마리: 저는 바흐에 대한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그게 195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영화 창작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저를 놀랍게 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 있어 즉시 브레송을 떠올렸습니다. [...] 이 프로젝트를 통해, 브레송이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 이뤘던 것을 그가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말은, 그 영화에서는 문학 텍스트가 있다면 이 영화에는 음악 텍스트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쟁이 말했듯, 문학 텍스트를 ‘원료로서 있는 그대로의 미학적 질료(matiére esthétique brute)’로 여기고, 영화를 위해 촬영하거나 각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누군가가 음악적 조직을 가지고 동일한 것을 시도하거나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 겨우 있었던 제가 그것을 그에게 설명했고, 그는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저 또한 많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약간 수줍어 했으며 저는 몹시 수줍어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며, 바로 당신입니다.” 그걸로 저는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저를 사로잡았던 또 다른 존재는 다니엘이었습니다. 우리는 1954년 리세 볼테르(Lycée Voltaire)라는 김나지움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브레송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을 때, 저는 그녀에게 저와 함께 각본을 쓰고 영화를 준비하고 싶은지 물어봤습니다. 물론 제가 처음 보자마자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약 제가 홀로 남았다면 아마 영화를 한 편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게을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아마도 실패했거나 포기했을 것입니다. 혹은…

장-마리와 다니엘이 독일에 왔을 때, 바흐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싸움은 수년간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서독과 동독에서 촬영이 가능한 장소와 바흐의 자필 악보를 물색했다. 그들은 이러한 장소뿐만 아니라, 바흐가 쓴 악보, 당대의 문서와 편지들에 대한 촬영 허가도 요청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은 오르간 연주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를 만났다. 당시 그는 암스테르담과 빈의 음악원에서 하프시코드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레온하르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역으로 출연시키고 카메라 앞에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레온하르트는 처음에 다소 조심스러워하며 영화가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장-마리와 다니엘은 설명했다. 결국에, 그는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형 프로젝트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를 위해 자료를 찾고 예산을 모으는 동안, ‘초조함 때문에’, 장-마리와 다니엘은 1962년에 그들의 첫 단편인 〈마쇼르카-머프〉를 만들었다. 1964/65년에는 하인리히 뵐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전보다 더 길어진 영화인 〈화해 불가 혹은 폭력만이 폭력이 지배하는 곳을 돕는다〉를 완성했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그들이 〈화해 불가〉의 계획을 위해 뮌헨의 촬영 후보지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은 이자르강 근처이자 영국식 정원 맞은편에 위치한 보겐하우젠 지역에 있던, 이전에 상류층이 살았던 대형 주택의 1층 응접실이었다. 나는 거기서 살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하녀가 지냈을 작은 방을 빌려 쓰고 있었다. 해당 주택은 친구들 소유였다. (그는 시인이었고, 그녀는 성악 지도자였다.) 친구들은 그들이 집을 살피는 동안 내가 그곳에 있어볼 것을 권했다. 나 또한 영화인이기 때문에, 이 프랑스 영화 감독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분명 흥미로울 것이라고 했다. 장-마리와 다니엘이 방문하여 이곳(방 가운데에 소파, 바로크 종교 조각상, 거대한 검은색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을 촬영지로 결정한 그날, 우리 셋은 소파에 앉아 다과를 즐기며 영화에 대해, 영화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요한 것은 집중과 정밀, 카메라 앞에서 발견하거나 구성한 것들에 대한 존중과 신중이라는 의견에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장-마리와 다니엘은 만프레트 블랑크의 영화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이 태도에 대해서 표현한다. 나에게는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말처럼 들린다.

장-마리는 기다란 풀과 작은 숲을 배경으로 두고 신중히 말을 이어간다.

장-마리: 그리고, 저는 예술과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두 부류의 예술가만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영특하게, 때로는 오만하게) 세상을 변화시킬 권리를 가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가능한 한 깨끗한 거울이 되려는 사람들. 콕토가 말한 “거울은 더 많이 성찰해야 한다(Les miroirs feraient bien de réfléchir advantage)”와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세잔의 작업에도 추상성은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연이라 불리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자연은 그가 바라보았던 것이고, 그의 눈을 충혈되게 하고, 그를 어지럽게 만든 것입니다. 그가 “이 산을 보시오, 한때는 불이었소”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산을 보고 그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수천 년 전과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태를 볼 수 없고, 그것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어쨌든, 제가 틀렸습니다. 세 번째 부류의 예술가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낙하산병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 영화의 99%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어딘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 ‘쿵’ 소리 내며 떨어지더니 이미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촬영하며, 그것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봐야 합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년 동안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잔이 그랬던 사람입니다.

다니엘: 세잔이 산을 보았던 방식은 그 위쪽에서 볼 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안개가 조금 걷히기를 기다려야 무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마리가 옆에서 조금 기다리더니 갑자기 저를 불러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고 말했습니다. 세잔의 작업에는 때때로 녹색인 구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은 그가 약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녹색 구름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녹색인 구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들을 볼 만큼의 인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다려야만 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장-마리: 하지만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화는 회화가 아닙니다. 영화는 사진으로 작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 일 년에 두 번 저에게 대본을 보내면서 처음부터 “우리는 이곳을 따라 운전하고, 빛은 고야나 베르메르 같아야 한다”고 적어놓는 이들. 이들만큼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헛소리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인물이 촬영되는 공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장-마리와 다니엘은 내가 그 당시까지 만든 영화가 어떤 유형인지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루는 뮌헨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내 첫 세 단편 영화를 보여주었다. 〈수문에서〉, 〈에세이〉, 〈뮐하임(루르)〉. 영화를 보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튜디오를 나올 때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다니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에세이〉가 매우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출구로 걸어 나갈 때 나는 장-마리에게 물었다. “오오오…” 그는 신음하며 손바닥으로 그의 목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 〈뮐하임(루르)〉 말이야…”라고 답했다. 나중에 나는 그들이 세 편의 영화를 모두 좋아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1963년에 나온 그들의 첫 영화, 〈마쇼르카-머프〉에 대한 내 반응도 같았다. 그 영화는 마치 창문이 열린 것 같은 해방감을 주었다. 저명한 주간지 디 차이트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요란을 떨 뿐… 영화는 독일의 재무장을 한탄한다”라는 말로 폄하했다. 다니엘과 장-마리가 〈화해 불가 혹은 폭력만이 폭력이 지배하는 곳을 돕는다〉의 촬영을 준비하던 시기, 남서독일방송(Südwestfunk)은 내가 외덴발트슈테텐이라는 마을에 관한 영화를 촬영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한 늙은 농부의 땅에 방을 빌려 몇 주 동안 마을과 일대를 조사했고, 저녁에는 이 은퇴한 농부와 이야기 나누곤 했다. 나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기록했다. 그의 말 중 상당수는 영화 안에서 다시 사용되었고, 모든 시퀀스를 아우르는 일종의 언어와 역사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때 장-마리와 다니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1년 후, 미셸 들라예가 뮌헨에 왔다.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화 평론가이자 장-마리, 다니엘의 친구였다. 들라예는 당시의 독일 영화 제작 현황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에에 자신의 조사 결과를 ‘독일 영의 영화(Allemagne — ciné zero)’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뮌헨에서 상영회가 있었고, 들라예는 거기서 내 영화를 비롯해 다른 젊은 필름메이커인 루돌프 토메, 막스 칠만, 클라우스 렘케의 영화들도 보았다. 영화 평론가, 제작자 그리고 배급사 관계자들도 초대되었다. 내 단편 영화 〈뮐하임(루르)〉가 상영되던 중 극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노동자 지구인 슈튀룸에서 촬영한 한 쇼트에서, 한 노부부가 수레를 끌고 회색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고, 그 벽에는 몇 년 전에 누군가가 “KPD에 가입하라(독일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적어둔 것이 남아있었다. 관객들 사이에서 한 배급사 관계자가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가 어떤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겠군!” 그러고는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미셸 들라예는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켰고, 안개 낀 공원에서 하이킹하는 노인이 나오는 다른 쇼트에서는 “브라보!”라고 외쳤다. 〈화해 불가〉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지만, 경쟁 부문은 아니었다. 영화는 별도의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당시 자국 내 대다수의 영화 평론가들과 필름메이커들은 〈화해 불가〉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영년의[시작의] 독일 영화에 대한 관대한 선물이기도 했다. 당시의 질의응답 기록은 형편없고 진부하다. 들라예는 카이에에 이 토론을 간략히 요약해 두었다.

장-마리 스트로브의 〈화해 불가〉는 경쟁 부문 밖에서 상영되었다. […] 이 영화는 (영화의 역사에서 시도된 가장 대담한 실험 중 하나이자,) 드라이어, 브레송, 로셀리니, 레네가 개척한 길을 따르는 명작이다. 최소한, 랑과 무르나우 이후 가장 중요한 독일 영화다. […] 스트로브의 영화는 무수한 ‘규칙’을 깬다. 독일에서는 (비평가들이 허영심을 위해 모든 영화에서 억지로 비판할 거리를 찾으려 하므로) 작품이 어떠한 이론에 비추어 제대로 정의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통상적인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지나치게 과하거나 모자란다고 평가받을 뿐이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왜냐하면 명작이라는 것은 항상 그 자체의 규칙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명료하게 영화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여기서 도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충분히 의심스럽고, 거의 파시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신이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 판단 뒤에 있는 이유와 기준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반하는 이론을 즉석에서 설명하는 것뿐이며, 그 과정에서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혹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몇 가지 사소한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은 파산 선고를 받게 된다. 스트로브가 깨뜨리는 규칙 중 하나는 언어다. ‘영화 독일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독일 영화든 외국 영화든 후시 녹음 과정에서 전문적인 능변가들이 구사하는 연기 학교식의 언어다. 이것이 유일하게 허가된 언어다. 독일인들은 영화 안에서 그들의 언어를 듣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화해 불가〉는, 물론, 동시녹음으로 촬영되었고, 비평가들은 약간의 쾰른 억양과 더불어, ‘액션 중’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억양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귀와 언어가 학살당하고 있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은 드라이어, 브레송, 레네, 그리고 고다르(〈알파빌〉?)가 그들의 언어를 어떻게 ‘학살’하는지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스트로브는 뵐의 매우 문학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에 있어, (무수한 이유 중 하나로) 텍스트의 문자적 특성과 문학적 특성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낭독을 향해 다가간다. 그는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브레히트를 소환한다. 신성모독이다! 독일이 브레히트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것은 공공연한 정통성의 영역 안에서만 그러할 것이다. 카메라에 관해서, 어떤 작자는 당신들은 하나의 렌즈만을 사용하도록 허가(?)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일곱 개의 렌즈로 촬영되었다.) 또다른 이는 당신들은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게 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 〈화해 불가〉에서 패닝과 트래킹 쇼트가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지 세어 주기를 바란다.)

일찍이 80년대에, 『필름—영화의 새롭고 오래된 것들(Filme—Neues und Altes vom Kino)』에서 요헨 브루노는 장-마리와 다니엘의 대화를 「기계에 저항하기(Der Maschine Widerstand leisten)」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이 대화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그들의 영화에서 역사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브루노: 하지만 당신들의 영화가 프리츠 랑과 명백히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스트로브: 그렇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작은 개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지만, 세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방향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은 프리츠 랑의 시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산업 밖에서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에서도 기인하는데, 이것은 프리츠 랑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산업 속에서도 자기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세대에 속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루노: 오늘 〈구름에서 저항까지〉를 보면서,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가는 동안 제가 느낀 것은…

스트로브: 소위 현대 부분,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입는 것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나오는 전후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요?

브루노: 네,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당신들 영화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자리가 역사에 의해 점유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트로브: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매우 듣기 좋은 말이지만, 조금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브루노: 내러티브 영화의 코드들은 공간과 시간, 즉 실제 공간과 실제 시간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환영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영화에서는, 영화의 공간과 시간이 역사가 생성되게끔 다뤄집니다. 주제로서 역사의 재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트로브: 당신이 명명한 그러한 환영들… 제 생각에는 맞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부분적으로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제 생각에는 대체로 의식적으로, 그 환영들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경향이 존재합니다.

브루노: 저는 더 이상 이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가 〈구름에서 저항까지〉를 보는 동안 떠올렸던 생각입니다. 저는 자막 때문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이 말해지기에, 자막에 얽매여서 이미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스트로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영화가 오직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것이며, 〈화해 불가〉와 〈마쇼르카-머프〉 또한 독일어권의 나라들을 위한 영화라는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산업의 목표는 이런 유형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더 국제적인 제품을 만들기를 원하며, 그렇게 해낼 것입니다.

베르나르 소벨이 만프레트 블랑크의 〈시선의 끈기〉에서:
스트로브 부부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제 상태가 좋아야 합니다. 요구하는 사항이 있으며… 그것은 운동과도 같습니다. 의자에 편히 앉아서 ‘푹’ 빠져드는 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에게 일하고, 협력할 것을 기대합니다. 제 생각에, 관객의 입장에서 스트로브-위예 부부의 영화는 관객이 동시에 창작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