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일환, 김동건 옮김
알렉산더 클루게: 사실 저는 교사입니다. 먼저 변호사를 했고, 그 다음엔 소설가를 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친구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통해 프리츠 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르노는 할리우드에서 그를 알게 되었고, 랑이 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벵갈의 호랑이〉 제작 당시 그의 조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시작 사흘째에 제작자가 랑의 모든 권한 빼앗아버렸습니다. 심지어 미술감독이나 촬영감독보다도 권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조건에서는 영화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가주의 영화를 위한 기반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룹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오버하우젠 그룹입니다. 이 그룹은 자유로운 영화 제작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생산적인 제안들을 제시하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이뤄냈습니다. 랑과의 경험 이후 저는 몇 편의 이야기를 썼고, 이탈리아에서는 몬다도리 출판사에서 『전기 Biografia』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미 62년에 출판된 바 있습니다.
영화 〈아니타 G.〉(어제와의 고별)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인데, 본래부터 문학이 아니라 영화 아이디어로서 구상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문학적 형식과 영화적 형식은 매우 다릅니다. 이후 저는 47그룹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저 외에도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페터 바이스, 귄터 그라스 등이 속한 소그룹이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서로가 쓴 이야기들을 읽고 비평합니다. 47그룹의 핵심은 단순히 새로움을 규정하거나 창조하는 문학적 주류가 아니라, 정치적 저항 세력이기도 합니다. 독일 문학은 독일 정부와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책, 어떤 독일인도 스탈린그라드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전후의 조사들은 불행했던 기억과 경험마저 파괴해버렸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허구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저는 직접적인 콜라주 방식으로 문서들을 수집했습니다. 책은 독자의 상상력이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도록 증언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그라드 같은 무언가 혹은 스탈린그라드의 모델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형성될 것입니다. 저는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영화에서도 이것을 시도했습니다.
이 외에도 저는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1950년까지의 히틀러 건축에 관한 영화입니다. 라인강 승전 기념비에 대한 것인데, 실제로는 도면과 모형만 존재하지만, 매우 거대한 규모입니다. 그 다음엔 독일 교수들의 상황에 대한 단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교육을 믿지 않기에, 교수들은 〈아니타 G.〉에서 드러나듯 희화화된 존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영화에서는 황제 치하, 공화국, 나치즘을 거쳐 전쟁 중 러시아에서 복무하며 여러 사람을 죽인 경찰의 곤경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공원에서 만난 두 연인을 죽이고 도덕적 혼란에 빠집니다. 끝내 그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왜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그토록 많이 총을 쏘았는데, 이번에는 감정을 가지고 총을 쏘았다는 것만으로 왜 처벌받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C & F: 영화와 문학에서 자연주의를 거부하시는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클루게: 문학에서 자연주의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상과 구체화 사이 하나의 매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문제는 언어의 응축입니다. 한 단어를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어는 (음악의 배음처럼) 여음적이어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야기의 진정한 복합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복합성을 재현하는 복합성 말입니다. 하나의 소설적 이야기는 여러 소설들이 하나의 성좌를 이루는 것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자연과 현실에서는, 현실의 비율이 형식을 결정해야 하며, 형식에는 현실과 유사한 복합성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현실을 원한다면, 서로 겹쳐진 다양한 이야기들, 소설들의 성좌가 필요합니다.
C & F: 소설의 형식이 현실의 구조와 유사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클루게: 그렇습니다. 서사적 구조, 서사적 산문, 서사적 드라마투르기가 필요합니다.
C & F: 브레히트적 의미에서의 서사인가요?
클루게: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적 의미에서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 뒤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죠… 서사적 층위들의 몽타주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들의 체계, 성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발자크의 역량이 없기 때문에 표현의 응축이 필요합니다. 발자크가 완벽하게 묘사한 세계 전체를 단 한 권의 책에 응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조이스가 이미 해냈고, 알프레트 되블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복합성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몽타주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C & F: 문학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클루게: 목표는 같지만 방법이 다릅니다.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구체적이고, 동시에 몽타주를 통해 모든 것을 추상화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는 육체, 색체, 감정, 하나의 온전한 인간성이 있습니다… 또한 음악의 역동적 가능성이 있고, 일종의 새로운 다성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연상의 흐름이 생기고, 화면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에도 그 흐름이 영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단어들이 그것들의 나쁜 사용으로 인해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습니다.
C & F: 롤랑 바르트가 이 문제를 다룬 적 있습니다.
클루게: 그렇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정의한 바 있습니다. 책이나 영화가 독자나 관객의 머릿속에서 형성될 때, 책의 경우는 단어들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힘이 실제로 행해지는 단어의 나쁜 사용으로 인해 파괴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반면 영화는 연상(associations, associazioni)을 통해 작동합니다. 문법도 없고 고정된 형식도 없습니다. 따라서 연상은 혹시 모를 영화의 나쁜 사용이 있더라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영화로는 모든 것이 가능한데, 연상이 본질적으로 더 근원적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유감입니다. 그렇다면 더 신중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영화에서는 구체음악이나 쇤베르크, 베베른 등의 현대 음악이 지닌 변증법적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음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연상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영화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음악이 사유 없는 변증법적 사유의 모델로서 발전한다면, 영화는 정확한 의미를 가진 인간적 사유의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 & F: 당신에게 몽타주란 무엇인가요…
클루게: 몽타주는 추상화를 할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입니다.
C & F: 파졸리니는 몽타주가 자유의 순간, 예술가의 의지라고 말합니다…
클루게: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책임에 대한 진지한 인식에 기반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멜리에스처럼 순수한 픽션을 만들 수도 있고, 뤼미에르처럼 순수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픽션을 다큐멘터리와 혼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술가 입장에서 책임 없는 상상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책임의 문제입니다… 정확한 책임을 통해, 순수하게 상징적인 수단으로도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허구적 수단을 통해 다큐멘터리나 기록 작업을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C & F: 수렴하는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당신의 인물은 어떤 위치에 있나요… 현실과 인물에 대한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시선은 어떻게 혼합됩니까?
클루게: 인물은 주관적 관점과 객관적 관점으로부터 형성됩니다. 저의 시선(시야) 역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영화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만드는 것이고, 저는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즉, 영화 뒤에 감독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인물이 각본에 없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스태프들이 웃어버렸지만 저는 그 웃음을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이 영화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C & F: 표현주의의 역사적 경험은 당신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칩니까? 영화에서 상징적 요소들, 음악, 움직임의 가속 등은 어떤 가치를 지닙니까?
클루게: 대학 장면들에서의 가속은 하나의 현상(phenomenon, fenomeno)을 응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저는 군중, 책의 양, 무질서한 학생들의 수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같은 책 제목의 반복에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화면 속에 무언가가, 혹은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객의 주의가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영화에서 어려움은 직접 볼 수 없는 모든 것, 즉 사회, 역사,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것을 말했습니다.
C & F: 이것을 표현주의적 문화의 잔재로 볼 수 있을까요?
클루게: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표현주의의 ‘방식’입니다. 저는 문학에서도 영화에서도 표현주의를 매우 좋아합니다. 특히 헨리크 갈렌의 〈골램〉 같은 영화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것은 방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문제입니다. 이는 표현주의에 대한 암시들이지만, 완전히 의식적인 것은 아닙니다…
C & F: 장-마리 스트로브의 〈화해불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클루게: 스트로브가 출발하는 원칙들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면과 관객의 사유를 비워내려는 그의 경향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의 공백, 그리고 몽타주의 대비들도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스트로브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 원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조로운 독백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하는 거리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경우 유발되는 짜증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오히려 덜 효과적으로 만듭니다.
C & F: 하지만 그 짜증이 하나의 도발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나요…
클루게: 그렇죠. 하지만 이 단조로움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더 이상 도발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양식, 스타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저는 스트로브가 스타일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스트로브는 언어와 내용의 관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기의 단조로움을 통해 언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얻으려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언어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문학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이 해결한 문제이지, 스트로브는 그렇지 않습니다.
C & F: 스트로브 영화에서 연기의 단조로움은 당신이 보기에 구어에 있어서의 언어 통제 시도인가요, 혹은 영화적 언어에서의 통제 시도인가요?
클루게: 구어에서만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학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실 단조로움만으로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스트로브는 좋은 원칙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타일적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브레히트처럼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들의 발화와 발음, 즉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오류를 범합니다. 언어를 통제하려 하고, 언어의 음조에서 거짓을 피하려 하면서 단조로움에 기댑니다. 그러나 음조는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합니다. 스트로브는 조이스가 좋아했던 것을 외면합니다…
C & F: 그러나 스트로브는 언어를 하나의 오브제로 사용합니다…
클루게: 그렇죠. 하지만 문제는 언어가 오브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어는 완전히 실재하기 위해 자연적인 음조, 즉 그것의 ‘아우라’가 필요합니다. 스트로브는 언어의 아우라를 감소시킵니다.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관객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언어의 음조를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말하는 인물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C & F: 당신의 영화에서 왜 동시녹음을 사용했습니까?
클루게: 저는 온전히 원본인 조각들로만 몽타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몽타주 조각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몽타주 조각들이 우연적일 때, 몽타주는 불가능하거나 무책임합니다… 원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C & F: 당신의 영화에서, 특히 〈비브르 사 비〉 같은 고다르 영화로부터의 영향을 인정하십니까?
클루게: 아니요, 〈아니타 G.〉의 이야기는 〈비브르 사 비〉보다 먼저 작성되었습니다. 1년 반 전입니다. 저와 고다르 사이에는 매우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다르가 시베리아의 사회 개혁 문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촬영은 파리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고다르는 유명론자입니다. 그는 진실에 관심이 없고, 구조들, 모델들, 진실의 알레고리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고다르는 항상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할 뿐이지, 대상이나 관객들과의 소통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C & F: 아마도 그가 시인이기 때문일 겁니다…
클루게: 그렇죠. 저는 시인이 아닙니다. 저는 사물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고다르가 영화적 언어의 해방을 추구하고 또 찾아낸 반면, 저는 파졸리니를 더 좋아합니다. 제 영화는 그의 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저는 〈아카토네〉와 〈마테복음〉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고다르는 우리 모두에게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지안프랑코 알바노, 아드리아노 아프라, 루이지 파치니가 녹음으로 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