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의 목소리』 中
박규재 옮김
AS 아린담 센
AL 아니크 르루아
Distant Voices: Two conversations with Annik Leroy, Julie Morel, Arindam Sen
해당 서적은 2023년 11월 브뤼셀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바탕으로 한 저작으로, 아니크 르루아, 쥘리 모렐, 아린담 센이 참여하였다. 이 저서에서 아린담 센은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 이본 라이너, 페터 네슬러, 로버트 크레이머 등 정치적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영화 작업의 계보를 언급하며, 현재와 과거의 울림이 어떻게 서로를 반향하는지 탐구한다. 아니크 르루아의 영화는 시간과 지리를 가로지르는 정치적 저항의 연속성을 상상하게 하는 급진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서술된다. Stereo Editions에서 2024년에 출간되었다.
이 대화를 발췌 번역하여 공개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아린담 센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행사에 아낌없는 성원과 도움을 준 아린담 센과 아니크 르루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We would like to thank Arindam Sen for granting permission to publish this excerpted translation of the conversation. We are also deeply grateful to Arindam Sen and Annik Leroy for their generous support and assistance for this event.
해당 저서는 다음 링크에서 구매가 가능합니다: https://stereoeditions.com/se21-distant-voices/
AS: 〈베를린 - 새벽에서 황혼까지〉는 고트프리트 벤의 무덤에서 시작하며,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당신이 눈 덮인 풍경 속을 걸어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운드트랙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제3번 D단조가 들리죠. 이 부분에서는 감정이 한층 고조된 느낌이 듭니다.
AL: 제가 걷는 모습이 보이는 그 길은 슈타인슈튀켄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은 베를린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호수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 길은 양쪽이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통로였고, 이를 따라가면 서베를린의 고립된 작은 영토로 이어졌습니다. 서베를린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여권을 가지고 검문소를 두 번 지나야 했습니다. 저는 이 장소의 특별함 때문에 그곳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면 속에 사용된 텍스트는 고트프리트 벤과 유대인 시인 엘제 라스커-쉴러의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벤은 이에 응답하지 않지요. 당시 벤은 나치에 호감을 보였고, 라스커-쉴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이 텍스트를 영화의 시작에 두는 것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고, 일종의 선언처럼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AS: 당신의 영화에서 여정이 갖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베를린 - 새벽에서 황혼까지〉에서도 그렇고 〈바다를 향하여〉에서도 그렇듯, 트래킹 쇼트의 사용과 트램, 기차, 철길이 등장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AL: 저는 실제로 트램, 기차, 역과 같은 장소들, 그리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제 할아버지가 트램 운전사였다는 점 정도만 말할 수 있겠네요. 여행을 할 때 창밖을 바라보면, 풍경과 도시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베를린〉에서는 S반 전철의 장면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도시의 구조와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S반이 단절되어 일부는 동베를린에서 사용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서베를린의 교통 체계를 분리하기란 쉽지 않았고, 그 결과 승하차가 불가능한 요새화된 유령역들이 존재했습니다. 영화에는 그러한 버려진 역의 장면이 들어있습니다. 〈바다를 향하여〉에서는 제목 그대로 도나우강의 시작점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흐름이 핵심입니다. 끊임없는 이동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점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누비오』와도 연결되는데, 이 책은 장-미셸 팔미에의 저서와 함께 제게 영감을 준 작품입니다. 다만 책을 각색하거나 책의 일부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향하여〉를 처음 보면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을 따라 쭉 여행하며 촬영한 연속적인 기록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3년에 걸쳐 서로 다른 계절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우리는 이 연속성의 감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죠. 촬영은 비엔나에서 시작해 도나우에싱겐으로, 이후 루마니아로 이동하는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실제 촬영 순서는 영화 속 흐름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AS: 그러니까 편집 과정에서 전체가 맞춰지는 것이군요.
AL: 그렇습니다. 영화의 구조는 도나우강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와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장소들에 의해 형성되었죠. 그래서 각 구간을 촬영하기 전에 모든 장소를 사전 답사하고 조사했습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AS: 전통적인 의미의 로드 무비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AL: 맞습니다, 전통적 의미의 로드 무비는 확실히 아닙니다. 조사 과정 자체가 핵심적인 요소였죠.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책은 수많은 인용과 참조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책들로 이어지고, 또 그 책들은 더 많은 자료로 확장됩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유럽의 놀라운 문화사가 드러나는데, 그 일부가 영화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AS: 이 영화를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구상하신 건가요?
AL: 영화의 제작은 주로 1994년부터 1997년 사이, 조사와 촬영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다누비오』를 읽은 것도 1994년이었습니다. 장벽 붕괴 직후, 브뤼셀의 괴테 인스티튜트와 협업해 동베를린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에 초대받았어요. 그 무렵 저는 친구 프란츠-페터 판 복셀라르와 함께 옛 동독 지역을 넓게 여행했고, 그 장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했습니다. 그 사진들이 결국 전시로 이어졌죠. 헬케 미셀비츠의 〈겨울에의 작별〉은 장벽 붕괴 직전 완성된 작품인데, 저는 1991년 혹은 1992년에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고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1994-1995년 이후에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방문이 가능해졌지만 그전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보스니아 전쟁도 한창이었고, 영화에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경 근처에 사는 한 가족과의 짧은 인터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상황과 다시 강화된 국경 통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 속에는 차 안에서 촬영한, 먼 곳에서 희미하게 스치는 풍경을 담은 장면도 있습니다. 원래 도나우강이 이어지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지역에서 촬영될 부분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결국 담기지 못했습니다.
AS: 〈베를린 - 새벽에서 황혼까지〉의 구스타프 말러처럼,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에서의 오토 레히너의 〈동지冬至〉처럼, 풍경 장면에 클래식 음악을 배치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러한 음악적 구성이 편집 단계에서 결정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AL: 〈베를린 - 새벽에서 황혼까지〉에서는 어떤 낭만주의적 정서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러뿐 아니라 리하르트 바그너의 짧은 곡도 사용했습니다. 이 음악들은 편집 과정에서 비교적 빠르게 결정되었습니다. 〈바다를 향하여〉의 경우, 편집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음악이 거의 없었고, 도나우에싱겐에서의 장면에만 클래식 음악이 들어있었습니다. 오토 레히너의 음악을 넣은 것도 마지막 단계에서였어요. 영화 작업 중 이바 비토바의 음악을 발견하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고, 어딘가에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오토 레히너를 알게 되었고, 곡을 선별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제 영화에서 음악이 이렇게 늦게 결정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편집하면서 다양한 음악을 들어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았고, 오토 레히너를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린 서로 모르지만, 제 영화에 당신 음악을 썼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는 “좋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는 시각장애인이었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화가 좋기를 바랍니다”라고 했고, 저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라고 답했죠. (웃음)
AS: 풍경을 낭만적 매혹에서 벗어나 역사가 매장된 장소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아다치 마사오가 ‘풍경론’에서 말한 바와도 연결되죠. 〈바다를 향하여〉를 예로 들어, 감독님의 작업에서 풍경과 역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AL: 〈바다를 향하여〉에는 숄더 마운트 카메라로 촬영한 쇼트가 있습니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떠들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향하게 되죠. 이처럼 영화 속 풍경은 단순한 자연경관 이상의 역사적 층위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과거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이는 아다치가 〈약칭: 연쇄살인마〉에서 풍경 속에 감춰진 역사와 폭력의 흔적을 드러낸 방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