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박규재 옮김
인터뷰어: 마리 프레링
DES HOMMES ENCORE, DANS LE VENT, ONT EU CETTE FAÇON DE VIVRE ET DE GRAVIR
〈히크 로자, 식물학의 악보〉의 탄생
나는 평생 동안 간절히 영화를 만들거나 영화라는 매체를 하기를 꿈꾸어 온 사람은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영화감독들을 곁에서 도와온 적은 있지만, 영화라는 산업은 나에게 늘 괴물처럼 느껴졌다. 자금 조달을 위한 여러 과정들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회화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선물해 주었는데, 그때 내 삶에서 처음으로 아주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이 편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편지들을 다시 제시하고, 현재 속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즉시 이 영화를 슈퍼 8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사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세잔이 말했듯이 “무언가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언제나 어떤 기술적 상태와도 연결되어 있다. 코다크롬 40은 1950-60년대에 많은 가정에서 사용되던 필름이었는데, 바로 단종되기 직전이었다. 〈히크 로자〉는 이 필름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영화다.
이 영화는 2년에 걸쳐 촬영되었다. 큰 스태프와 함께하는 촬영의 부담 없이, 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촬영했다. 나는 촬영을 함께 해준 카멜 벨라이드와 편집자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금을 찾았다. 사람들에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채 일을 시키는 것은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랑스국립영화센터로부터 3만 5천 유로를 지원받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느 편지에서 친구 소피 리프크네히트에게 함께 코르시카 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겸손하게 말하자면, 혹은 어쩌면 다소 뻔뻔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여행을 대신 하고 싶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하게, 이 프로젝트를 강력히 지지해 준 한 사람 덕분에 코르시카 지방정부로부터도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일종의 은총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마르세유의 FID 영화제에 선정되었고, 영화에 완전히 매료된 장피에르 렘이 이 작품을 전 세계로 가져가게 되었다.
텍스트에서 영화로
어떤 텍스트가 영화가 되는 과정은 하나의 연금술과도 같다. 그것은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일종의 감각의 제작 과정으로, 지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편지들은 나에게 물질로 드러난 말과도 같았고, 그것들에 정당함을 돌려주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촬영하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가 텍스트를 듣게 하고 보이게 만드는 데 얼마나 뛰어난 매체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 텍스트와 소리, 이미지들을 서로 관계 속에 놓는 능력 말이다. 텍스트는 곧 소리이자 쇼트가 된다. 고다르가 말했듯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예술은 오직 영화뿐이다. 영화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처음 들리는 시는 파울 첼란의 시인데, 다니엘 위예가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센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던 장소, 미라보 다리를 촬영하러 갔다. 이 영화에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그 안에 존재한다. 영화는 또한 유령들을 실어 나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쇼트에는 아주 작은 관목이 보인다. 그것은 파리에서 파울 첼란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아파트 아래에 있는 것으로, 큰 나무에서 돋아난 작은 새순이다.
이 영화에는 문학적 의미에서의 통보tombeau라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말라르메의 「아나톨을 위한 통보」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투쟁에 대한 헌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을 말한다. "고개를 높이 들어라. 잠들지 말라. 위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그 위험을 환기하려 한다.
주의하기
우리는 늘 뒤에 숨은 생각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앞에 있는 생각1)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앞에 있는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의 그것은,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거의 하늘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예를 들어 옆 공원에서 촬영한 작은 풀밭의 쇼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양귀비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묻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영화 안에 어떤 위계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것이 같은 가치를 가져야 했고, 모든 것이 동등하게 중요해야 했다.
2분 40초 동안 이어지는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양귀비는 우리에게 아주 아름다운 선물을 주었다. 그 꽃은 정말 아주 훌륭하게 연기한다. 내가 프레임 밖으로 나갈까, 아니면 다시 들어올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메뚜기까지 등장한다. 나는 그곳에 살아 있는 것에서 출발해 그 생을 포착하고, 그 생의 순간을 건네고자 한다. 제작진에게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밤나무와 양귀비꽃과 메뚜기를 캐스팅한다고. 그리고 나는 내 배우들이 아주 마음에 든다. 영화는 사물들 앞에 멈춰 설 수 있게 해주고, 우리가 더 이상 멈춰 서서 바라보지 않는 시간을 다시 취하게 해준다.
이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근대 유럽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 흔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것을 잊고자 하는 하나의 욕망이자, 동시에 경계와 주의를 촉구하는 요청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역주 - 뒤에 숨은 생각 / 앞에 있는 생각, arrière-pensées/avant-pensées 말장난임
혼란과 침잠
나는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명백함들이 나에게 다가와 스스로를 강요하는 듯하다. 영화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소리가 사라지는 양귀비꽃밭의 쇼트처럼. 나는 그곳에서 흘러내린 피의 붉은색을 느꼈다. 이 양귀비꽃들은 전투를 치른 이들의 군대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그 붉음을 진정으로 느끼려면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온전히 존재하도록 침묵이 필요했다. 침묵의 순간들은 고통 앞에서의 혼란이자 동시에 침잠이다.
내 삶의 어느 시기에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칠 기도를 찾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끔찍한 결핍이며 기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처벌이다. 우리는 어떤 신비주의나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도 기도와 침잠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은 신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음에 있다. 〈히크 로자〉의 침묵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말 없는 기도들이다. 이 영화는 기도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다.
라캉은 우리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냈다. 그는 우리를 ‘서구화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서구화되어 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례를 되찾으려는 시도이며 영화는 어쩌면 가능한 마지막 형태의 침잠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 앞에서의 겸허함과 함께하는 침잠이다. 영화는 그것이 없다면 결코 연결되지 않았을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다. 어떤 전혀 새로운 것. 이것은 편집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좋아하는 쇼트를 남기려고 아무리 버텨도 그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영화가 말해준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기쁨 속에서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명령을 내린다. 물론 그것은 촬영된 물질에 관한 것이다. 나는 많이 촬영하지 않는다. 촬영분도 아주 적다. 흔히 말하는 ‘혹시를 대비한’ 쇼트는 절대 찍지 않는다. 그리고 〈히크 로자〉에 들어간 쇼트들은 모두 온전한 쇼트들로, 그 안에서 잘려나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영화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촬영 단계에서부터 이미 결정된다. ‘혹시를 대비해’ 찍는 쇼트라니, 대체 무엇을 대비한다는 것인가.
보편적인 박새들
편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 나는 두 가지를 제외하기로 했다. 날짜와 수신자였다. 그것들이 영화를 지나치게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끌고 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이 편지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쓰인 것 같다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수신자가 화면 밖에 머물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 편지들은 모두에게 돌려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날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것은 특정 시대에만 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박새는 오늘날 누구나 볼 수 있는 바로 그 박새이며, 1917년의 박새가 아니라 시간에 속하지 않는 박새들이다. 여기에는 한 여성, 마틸데 부름에게 보내진 놀라운 편지가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 여성을 두고 '용감한 작은 친구'라고 부를 때 그것은 칭찬이었다. 이 편지는 우리가 직접 쓰거나 받아보고 싶을 만큼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긋나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 보내는 경계의 신호를 듣는 일이며,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에게 보내지는 징후들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리고 타인을 향해 그러한 경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바다
모든 것은 바다의 왕국에서 시작된다. 내 삶에서 "이곳이 바로 집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들은 지중해 한가운데의 배 위에 있을 때였다. 그곳이 집이며, 머무를 수 있어야 하는 장소다. 〈히크 로자〉에서는 이것이 코르시카로의 여행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나에게 바다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꿈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가라앉히기로 결정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부름이다. 나는 전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부름은 중요하다. 항구에서 나는 떠나고 돌아오는 배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어떤 배도 타지 않은 채로. 그것은 여행으로의 부름이라기보다 침잠으로의 부름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바다의 소리와 함께. 고요함으로의 부름이면서 동시에 폭풍으로의 부름이다.
밤나무를 위한 라멘투
이 영화는 라멘투로 시작한다. 코르시카의 장송가다. 나는 코르시카에서는 무엇이든 라멘투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은 인간을 위해 쓰이지만, 동물이나 식물을 위한 것도 존재한다. 상추를 위한 라멘투도 있고, 여기에서는 한 밤나무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여성의 목소리,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나무의 죽음,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 사이에는 어떤 자명한 연결이 있었다.
이 라멘투에서 밤나무는 나무꾼에게 말을 건넨다. 코르시카의 역사를 되짚으며, 언젠가 코르시카 사람들이 모든 밤나무를 베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수세기 동안 이 섬을 먹여 살려 온 것이 바로 이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밤나무를 가구로 바꾸어버린 비극적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나무들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가구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에서 나를 가장 깊이 흔든 것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부끄러움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더 자주 느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자주 존재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박새가 되고 싶었다는 것, 다른 종에 속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럼에도 거리의 전투에서나 감옥에서 내 자리를 지키다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 깊은 자아는 동지들보다 오히려 나의 박새들에 더 가까이 속해 있다." 나는 그녀에게도 어떤 깊은 우울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들을 관통하는 어떤 것이다. 그녀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이 우울감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투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가장 나쁜 도피 방식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친구들
나는 아주 늦게 영화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나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책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독서에 대한 어떤 열광적인 열정 속에서 자랐다. 내 첫 번째 책은 『소피의 불행』이었고 네 살 때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집에 돈이 거의 없었고 어머니는 도서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다음 책을 받기까지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소피의 불행』을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해서 읽었다. 어쨌든 책이 내 삶을 구해주었다고 말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영화는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화감독들과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다르와 작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영화를 전부 보지 않은 상태였다. 스트로브와의 대담집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읽거나 본 작품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우리가 읽고 보았던 것들을 모두 잊게 되기 때문이다.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몇몇 영화들과 매우 강하고 밀도 높은 우정을 맺고 있다. 영화감독이나 그들의 전체 작품이 아니라 바로 개별적인 영화들과의 관계다. 그것이 내가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우정들, 영화들과의 만남은 인간적인 만남과도 같다. 그것은 관계이며 대화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다른 영화들과 이어지는 대화다. 그리고 각각의 영화마다 또 다른 친구들과 나누는 또 하나의 대화이기도 하다.
바람을 마주하기, 수풀의 악보
〈바람을 마주하기〉를 위해 나는 이미 알고 있던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로 하나의 구조를 세웠다. 이 영화는 내가 개인적인 폭풍 속에 있던 시기에 준비된 작업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텍스트의 조각들, 이미지의 조각들과 맺는 우정의 이야기다. 그것들은 나에게 붕대이자 연고처럼 작용했고 영화는 그것들이 가져다준 치유 속에서 만들어졌다. 〈바람을 마주하기〉는 거의 하나의 책처럼 만들어졌고 세 개의 챕터 제목이 있었다. '나는 여행의 화상을 햇빛에 드러낸다', '그러나 회복은 어린 시절로의 귀환과도 같다', '모든 새벽은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이 제목들은 남지 않았다. 영화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주제는 우정, 특히 인간적인 우정이다. 나는 아주 빨리 화면에는 친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만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영화에는 모두 25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의 고독, 또 하나의 고독, 또 하나의 고독이 더해지면, 적어도 하나의 쇼트 안에서는 그것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공동체는 어린 시절과 센생드니를 떠올리게 한다. 센생드니 역시 이 영화의 한 주제이며, 무한한 고독으로부터 어떻게 공동체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나는 하나의 노트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붙여 넣은 것으로 엑사콩타의 회계 장부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일장부’2)라 불리는 것으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책이다. 나는 그것을 프랑스국립영화센터에 보냈고 그들은 즉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텍스트들은 영화 안에 들어갔고 자료집에 있던 이미지들은 일종의 기억 보조 장치이거나 해야 할 일의 목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영화 안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어떤 것을 가리키며 영화 속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과정의 한 단계다.
젊은 시절의 채플린 이미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영화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영화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다. 사진은 약간 흐릿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2) 역주 - Exacompta라는 회사에서 만든 brouillard journalier라는 회계 장부를 말함
“읽힌 것은 들린 것을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들린 것은 읽힌 것을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거트루드 스타인)
이 영화의 한 가지 원칙은, 등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읽게 될 텍스트를 미리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촬영 직전까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듣게 될지 알지 못했다. 내가 찍고자 했던 것은 어떤 텍스트를 듣는 순간 얼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듣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각 사람에게 텍스트를 배분하는 기준은 내가 그들과 맺고 있던 관계였다. 그 텍스트는 우리가 맺고 있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얼굴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어떤 얼굴은 어떤 텍스트를 말할 수 있고, 어떤 얼굴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어떤 얼굴은 어떤 텍스트를 들을 수 있고, 어떤 얼굴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얼굴이 텍스트에 더해줄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듣는다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벌거벗은 텍스트
낭독은 연기보다 훨씬 더 강렬한 청취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배우의 몸짓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낭독이란 텍스트 그대로의 상태3)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텍스트들은 말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들리기 위한 것이다. 영화의 관객은 또한 텍스트의 독자로서 그 안에 자리할 수 있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 브레송의 경우처럼, 텍스트를 들리게 하기 위해 배우들과 작업하는 일은 해낼 수 없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3) 역주 - 벌거벗은 상태: 이 글 소제목이랑 동일한 표현
슬픔에 대한 믿음
우리는 슬픔이 금지된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슬픔에 대한 믿음을 갖고자 하며, 아마도 생의 끝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위로받지 못한 아이를 바라보고자 한다. 위로받지 못한 아이, 그리고 현재의 슬픔들, 어떤 종류의 고독에서 오는 슬픔. 그 안에는 슬픔이 있지만 동시에 에너지와 어떤 명랑함도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동맹, 아주 아름다운 동맹은 콜레트 마니의 노래 〈멜로코통〉이었다. 우리는 위로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포드가 말했듯이, 이 행성을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것인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문턱들
〈바람을 마주하기〉에는 문턱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어쩌면 나는 문턱에 앉아 있는 늙은 아이인지도 모른다. 문턱은 어린 시절과 관계가 있거나, 혹은 어린 시절과 닿아 있는 노년과 관계가 있다. 어쩌면 영화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나 다시 발견된 어린 시절, 혹은 위로받지 못한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또한 집의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풍경을 듣는 일
나는 이 영화가 물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의 텍스트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병이 치유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멀리, 이야기의 강 위를 따라 그 하구까지 떠내려갈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이 영화에 강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바다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프랑크 비알은 자신의 집 근처인 샤랑트 지역으로 로케이션 답사를 가보자고 제안했고, 나는 그곳에서 아주 정확한 장소들을 발견했다. 〈바람을 마주하기〉에서 풍경 쇼트가 〈히크 로자〉보다 많은 이유는, 〈히크 로자〉에서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장소들만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바람 또한 필요했다. 바람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며, 결국은 바람을 어떻게 마주하며 버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을 촬영할 때와 마찬가지로, 풍경이 텍스트를 듣는 순간을 찍고 싶었다. 그리고 샤랑트 강가의 풍경들이 내가 제안한 텍스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텍스트와 〈바람을 마주하기〉의 텍스트를 듣는 풍경은 전혀 다른 종류의 풍경이며 프레임이다. 〈히크 로자〉에는 화면에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이 말한다.
풍경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바람을 마주하기〉는 다시 말을 되찾으려는 하나의 제안이다.
나는 평생 동안 간절히 영화를 만들거나 영화라는 매체를 하기를 꿈꾸어 온 사람은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영화감독들을 곁에서 도와온 적은 있지만, 영화라는 산업은 나에게 늘 괴물처럼 느껴졌다. 자금 조달을 위한 여러 과정들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회화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선물해 주었는데, 그때 내 삶에서 처음으로 아주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이 편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편지들을 다시 제시하고, 현재 속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즉시 이 영화를 슈퍼 8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사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세잔이 말했듯이 “무언가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언제나 어떤 기술적 상태와도 연결되어 있다. 코다크롬 40은 1950-60년대에 많은 가정에서 사용되던 필름이었는데, 바로 단종되기 직전이었다. 〈히크 로자〉는 이 필름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영화다.
이 영화는 2년에 걸쳐 촬영되었다. 큰 스태프와 함께하는 촬영의 부담 없이, 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촬영했다. 나는 촬영을 함께 해준 카멜 벨라이드와 편집자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금을 찾았다. 사람들에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채 일을 시키는 것은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랑스국립영화센터로부터 3만 5천 유로를 지원받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느 편지에서 친구 소피 리프크네히트에게 함께 코르시카 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겸손하게 말하자면, 혹은 어쩌면 다소 뻔뻔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여행을 대신 하고 싶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하게, 이 프로젝트를 강력히 지지해 준 한 사람 덕분에 코르시카 지방정부로부터도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일종의 은총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마르세유의 FID 영화제에 선정되었고, 영화에 완전히 매료된 장피에르 렘이 이 작품을 전 세계로 가져가게 되었다.
텍스트에서 영화로
어떤 텍스트가 영화가 되는 과정은 하나의 연금술과도 같다. 그것은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일종의 감각의 제작 과정으로, 지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편지들은 나에게 물질로 드러난 말과도 같았고, 그것들에 정당함을 돌려주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촬영하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가 텍스트를 듣게 하고 보이게 만드는 데 얼마나 뛰어난 매체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 텍스트와 소리, 이미지들을 서로 관계 속에 놓는 능력 말이다. 텍스트는 곧 소리이자 쇼트가 된다. 고다르가 말했듯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예술은 오직 영화뿐이다. 영화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처음 들리는 시는 파울 첼란의 시인데, 다니엘 위예가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센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던 장소, 미라보 다리를 촬영하러 갔다. 이 영화에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그 안에 존재한다. 영화는 또한 유령들을 실어 나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쇼트에는 아주 작은 관목이 보인다. 그것은 파리에서 파울 첼란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아파트 아래에 있는 것으로, 큰 나무에서 돋아난 작은 새순이다.
이 영화에는 문학적 의미에서의 통보tombeau라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말라르메의 「아나톨을 위한 통보」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투쟁에 대한 헌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을 말한다. "고개를 높이 들어라. 잠들지 말라. 위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그 위험을 환기하려 한다.
주의하기
우리는 늘 뒤에 숨은 생각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앞에 있는 생각1)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앞에 있는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의 그것은,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거의 하늘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예를 들어 옆 공원에서 촬영한 작은 풀밭의 쇼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양귀비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묻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영화 안에 어떤 위계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것이 같은 가치를 가져야 했고, 모든 것이 동등하게 중요해야 했다.
2분 40초 동안 이어지는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양귀비는 우리에게 아주 아름다운 선물을 주었다. 그 꽃은 정말 아주 훌륭하게 연기한다. 내가 프레임 밖으로 나갈까, 아니면 다시 들어올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메뚜기까지 등장한다. 나는 그곳에 살아 있는 것에서 출발해 그 생을 포착하고, 그 생의 순간을 건네고자 한다. 제작진에게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밤나무와 양귀비꽃과 메뚜기를 캐스팅한다고. 그리고 나는 내 배우들이 아주 마음에 든다. 영화는 사물들 앞에 멈춰 설 수 있게 해주고, 우리가 더 이상 멈춰 서서 바라보지 않는 시간을 다시 취하게 해준다.
이 영화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근대 유럽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 흔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것을 잊고자 하는 하나의 욕망이자, 동시에 경계와 주의를 촉구하는 요청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역주 - 뒤에 숨은 생각 / 앞에 있는 생각, arrière-pensées/avant-pensées 말장난임
혼란과 침잠
나는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명백함들이 나에게 다가와 스스로를 강요하는 듯하다. 영화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소리가 사라지는 양귀비꽃밭의 쇼트처럼. 나는 그곳에서 흘러내린 피의 붉은색을 느꼈다. 이 양귀비꽃들은 전투를 치른 이들의 군대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그 붉음을 진정으로 느끼려면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온전히 존재하도록 침묵이 필요했다. 침묵의 순간들은 고통 앞에서의 혼란이자 동시에 침잠이다.
내 삶의 어느 시기에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칠 기도를 찾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끔찍한 결핍이며 기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처벌이다. 우리는 어떤 신비주의나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도 기도와 침잠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은 신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음에 있다. 〈히크 로자〉의 침묵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말 없는 기도들이다. 이 영화는 기도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다.
라캉은 우리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냈다. 그는 우리를 ‘서구화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서구화되어 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례를 되찾으려는 시도이며 영화는 어쩌면 가능한 마지막 형태의 침잠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 앞에서의 겸허함과 함께하는 침잠이다. 영화는 그것이 없다면 결코 연결되지 않았을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다. 어떤 전혀 새로운 것. 이것은 편집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좋아하는 쇼트를 남기려고 아무리 버텨도 그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영화가 말해준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기쁨 속에서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명령을 내린다. 물론 그것은 촬영된 물질에 관한 것이다. 나는 많이 촬영하지 않는다. 촬영분도 아주 적다. 흔히 말하는 ‘혹시를 대비한’ 쇼트는 절대 찍지 않는다. 그리고 〈히크 로자〉에 들어간 쇼트들은 모두 온전한 쇼트들로, 그 안에서 잘려나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영화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촬영 단계에서부터 이미 결정된다. ‘혹시를 대비해’ 찍는 쇼트라니, 대체 무엇을 대비한다는 것인가.
보편적인 박새들
편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 나는 두 가지를 제외하기로 했다. 날짜와 수신자였다. 그것들이 영화를 지나치게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끌고 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이 편지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쓰인 것 같다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수신자가 화면 밖에 머물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 편지들은 모두에게 돌려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날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것은 특정 시대에만 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박새는 오늘날 누구나 볼 수 있는 바로 그 박새이며, 1917년의 박새가 아니라 시간에 속하지 않는 박새들이다. 여기에는 한 여성, 마틸데 부름에게 보내진 놀라운 편지가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 여성을 두고 '용감한 작은 친구'라고 부를 때 그것은 칭찬이었다. 이 편지는 우리가 직접 쓰거나 받아보고 싶을 만큼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긋나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 보내는 경계의 신호를 듣는 일이며,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에게 보내지는 징후들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리고 타인을 향해 그러한 경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바다
모든 것은 바다의 왕국에서 시작된다. 내 삶에서 "이곳이 바로 집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들은 지중해 한가운데의 배 위에 있을 때였다. 그곳이 집이며, 머무를 수 있어야 하는 장소다. 〈히크 로자〉에서는 이것이 코르시카로의 여행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나에게 바다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꿈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가라앉히기로 결정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부름이다. 나는 전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부름은 중요하다. 항구에서 나는 떠나고 돌아오는 배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어떤 배도 타지 않은 채로. 그것은 여행으로의 부름이라기보다 침잠으로의 부름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바다의 소리와 함께. 고요함으로의 부름이면서 동시에 폭풍으로의 부름이다.
밤나무를 위한 라멘투
이 영화는 라멘투로 시작한다. 코르시카의 장송가다. 나는 코르시카에서는 무엇이든 라멘투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은 인간을 위해 쓰이지만, 동물이나 식물을 위한 것도 존재한다. 상추를 위한 라멘투도 있고, 여기에서는 한 밤나무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여성의 목소리,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나무의 죽음,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 사이에는 어떤 자명한 연결이 있었다.
이 라멘투에서 밤나무는 나무꾼에게 말을 건넨다. 코르시카의 역사를 되짚으며, 언젠가 코르시카 사람들이 모든 밤나무를 베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수세기 동안 이 섬을 먹여 살려 온 것이 바로 이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밤나무를 가구로 바꾸어버린 비극적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나무들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가구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에서 나를 가장 깊이 흔든 것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부끄러움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더 자주 느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자주 존재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박새가 되고 싶었다는 것, 다른 종에 속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럼에도 거리의 전투에서나 감옥에서 내 자리를 지키다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 깊은 자아는 동지들보다 오히려 나의 박새들에 더 가까이 속해 있다." 나는 그녀에게도 어떤 깊은 우울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들을 관통하는 어떤 것이다. 그녀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이 우울감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투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가장 나쁜 도피 방식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친구들
나는 아주 늦게 영화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나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책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독서에 대한 어떤 열광적인 열정 속에서 자랐다. 내 첫 번째 책은 『소피의 불행』이었고 네 살 때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집에 돈이 거의 없었고 어머니는 도서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다음 책을 받기까지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소피의 불행』을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해서 읽었다. 어쨌든 책이 내 삶을 구해주었다고 말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영화는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화감독들과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다르와 작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영화를 전부 보지 않은 상태였다. 스트로브와의 대담집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읽거나 본 작품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우리가 읽고 보았던 것들을 모두 잊게 되기 때문이다.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몇몇 영화들과 매우 강하고 밀도 높은 우정을 맺고 있다. 영화감독이나 그들의 전체 작품이 아니라 바로 개별적인 영화들과의 관계다. 그것이 내가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우정들, 영화들과의 만남은 인간적인 만남과도 같다. 그것은 관계이며 대화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다른 영화들과 이어지는 대화다. 그리고 각각의 영화마다 또 다른 친구들과 나누는 또 하나의 대화이기도 하다.
바람을 마주하기, 수풀의 악보
〈바람을 마주하기〉를 위해 나는 이미 알고 있던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로 하나의 구조를 세웠다. 이 영화는 내가 개인적인 폭풍 속에 있던 시기에 준비된 작업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텍스트의 조각들, 이미지의 조각들과 맺는 우정의 이야기다. 그것들은 나에게 붕대이자 연고처럼 작용했고 영화는 그것들이 가져다준 치유 속에서 만들어졌다. 〈바람을 마주하기〉는 거의 하나의 책처럼 만들어졌고 세 개의 챕터 제목이 있었다. '나는 여행의 화상을 햇빛에 드러낸다', '그러나 회복은 어린 시절로의 귀환과도 같다', '모든 새벽은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이 제목들은 남지 않았다. 영화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주제는 우정, 특히 인간적인 우정이다. 나는 아주 빨리 화면에는 친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만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영화에는 모두 25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의 고독, 또 하나의 고독, 또 하나의 고독이 더해지면, 적어도 하나의 쇼트 안에서는 그것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공동체는 어린 시절과 센생드니를 떠올리게 한다. 센생드니 역시 이 영화의 한 주제이며, 무한한 고독으로부터 어떻게 공동체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나는 하나의 노트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붙여 넣은 것으로 엑사콩타의 회계 장부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일장부’2)라 불리는 것으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책이다. 나는 그것을 프랑스국립영화센터에 보냈고 그들은 즉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텍스트들은 영화 안에 들어갔고 자료집에 있던 이미지들은 일종의 기억 보조 장치이거나 해야 할 일의 목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영화 안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어떤 것을 가리키며 영화 속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과정의 한 단계다.
젊은 시절의 채플린 이미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영화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영화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다. 사진은 약간 흐릿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2) 역주 - Exacompta라는 회사에서 만든 brouillard journalier라는 회계 장부를 말함
“읽힌 것은 들린 것을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들린 것은 읽힌 것을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거트루드 스타인)
이 영화의 한 가지 원칙은, 등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읽게 될 텍스트를 미리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촬영 직전까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듣게 될지 알지 못했다. 내가 찍고자 했던 것은 어떤 텍스트를 듣는 순간 얼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듣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각 사람에게 텍스트를 배분하는 기준은 내가 그들과 맺고 있던 관계였다. 그 텍스트는 우리가 맺고 있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얼굴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어떤 얼굴은 어떤 텍스트를 말할 수 있고, 어떤 얼굴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어떤 얼굴은 어떤 텍스트를 들을 수 있고, 어떤 얼굴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얼굴이 텍스트에 더해줄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듣는다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벌거벗은 텍스트
낭독은 연기보다 훨씬 더 강렬한 청취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배우의 몸짓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낭독이란 텍스트 그대로의 상태3)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텍스트들은 말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들리기 위한 것이다. 영화의 관객은 또한 텍스트의 독자로서 그 안에 자리할 수 있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 브레송의 경우처럼, 텍스트를 들리게 하기 위해 배우들과 작업하는 일은 해낼 수 없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3) 역주 - 벌거벗은 상태: 이 글 소제목이랑 동일한 표현
슬픔에 대한 믿음
우리는 슬픔이 금지된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슬픔에 대한 믿음을 갖고자 하며, 아마도 생의 끝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위로받지 못한 아이를 바라보고자 한다. 위로받지 못한 아이, 그리고 현재의 슬픔들, 어떤 종류의 고독에서 오는 슬픔. 그 안에는 슬픔이 있지만 동시에 에너지와 어떤 명랑함도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동맹, 아주 아름다운 동맹은 콜레트 마니의 노래 〈멜로코통〉이었다. 우리는 위로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포드가 말했듯이, 이 행성을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것인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문턱들
〈바람을 마주하기〉에는 문턱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어쩌면 나는 문턱에 앉아 있는 늙은 아이인지도 모른다. 문턱은 어린 시절과 관계가 있거나, 혹은 어린 시절과 닿아 있는 노년과 관계가 있다. 어쩌면 영화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나 다시 발견된 어린 시절, 혹은 위로받지 못한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또한 집의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풍경을 듣는 일
나는 이 영화가 물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의 텍스트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병이 치유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멀리, 이야기의 강 위를 따라 그 하구까지 떠내려갈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이 영화에 강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바다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프랑크 비알은 자신의 집 근처인 샤랑트 지역으로 로케이션 답사를 가보자고 제안했고, 나는 그곳에서 아주 정확한 장소들을 발견했다. 〈바람을 마주하기〉에서 풍경 쇼트가 〈히크 로자〉보다 많은 이유는, 〈히크 로자〉에서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장소들만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바람 또한 필요했다. 바람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며, 결국은 바람을 어떻게 마주하며 버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을 촬영할 때와 마찬가지로, 풍경이 텍스트를 듣는 순간을 찍고 싶었다. 그리고 샤랑트 강가의 풍경들이 내가 제안한 텍스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텍스트와 〈바람을 마주하기〉의 텍스트를 듣는 풍경은 전혀 다른 종류의 풍경이며 프레임이다. 〈히크 로자〉에는 화면에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이 말한다.
풍경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바람을 마주하기〉는 다시 말을 되찾으려는 하나의 제안이다.
마리 프레링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