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스콧 맥도날드
인터뷰이: 피터 허튼
2007년
일환 옮김
〈바다에서〉는 허튼의 이전 영화들 중 〈시간과 물결〉(2000)을 제외하고는 가장 내러티브 영화에 가까운 작업이다. 〈시간과 물결〉은 허드슨강을 따라 뉴욕 항구에서 올버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왔던 길의 대부분을 되돌아가는 여정을 기록한 영화다. 〈바다에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의 “삶”을 시각화한다. 첫 섹션은 거대한 컨테이너선을 제작하는,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형형색색의 한국 조선소를 묘사한다. 두 번째 섹션은 적재된 컨테이너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항해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마지막 섹션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변에서 노동자들이 노후된 선박을 해체하며 재활용 가능한 금속 및 기타 자재들을 분리해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초국가적(transnational) 자본주의의 함의 그리고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은밀한 정치적 성찰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허튼의 정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그의 모든 영화들 안에서 드러내는 경험의 특성이다. 그의 영화들은 관조적인 시청 경험을 제공하며, 우리가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더 심원하고 신중한 인식을 형성하도록 종용한다. 허튼의 영화는 우리가 우리의 지각 자체를 존중하게 하고, 신경증적 소비 세계의 관습성으로부터 벗어난 영화 경험을 즐기도록 돕는다.
〈바다에서〉에 대한 본 대화는, 허튼과 진행했던 인터뷰의 일부분이다. 해당 인터뷰는 2007년 10월 초 하버드 대학교에서 시작되었고, 다음 몇 달 동안 전화 통화를 거쳐 다듬어졌다.
스콧 맥도날드: 어젯밤 〈바다에서〉의 마지막 섹션, 치타공에서의 선박 해체 장면을 이야기할 때, 당신의 환경 인식이 영화 자체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환경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의식한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피터 허튼: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풍경, 도시(urbanscapes), 선박 같은 것들을 기록하는 내 작업 방식은, 필연적으로 그 시간과 장소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나는 오랫동안 배 위에서 일해왔고 이런 산업 기계들이 태생적으로 환경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박은 화물을 적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한폭탄과도 같다. 탱커(tanker)로서 근무하면 하게 될 일 중 하나가 탱크를 청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빈번한 일이지만 상상하기는 어려운) 원유에서 당밀(molasses)로 화물을 바꾸는 작업에 있어 ‘버터워싱(butterworthing)’을 해야 한다. 고압 호스를 선박 깊숙한 곳 화물 탱크까지 들고 가서, 가능한 한 탱크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바닥에 남은 침전물을 긁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침전물은 종종 산업용 화학물질에 오염되어 있다. 그 모든 폐수는 어디로 갈까? 선박 옆으로 흘려보내져 바다로 방류된다. 배들은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척하고, 화학 잔류물을 처리한다. 현재 환경보호청(EPA)은 더 많은 안전장치를 고안해내고 있고, 이제 항구에서는 폐수를 방류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폐수를 세계 저편의 다른 곳에서 방류하여 외래종이 유입돼, 그 지역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일도 있었다.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이 영화를 환경영화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조선과 선박해체 산업을 영화적으로 기록했던 작업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기도 할 것이다.
SM: 〈바다에서〉의 삼부 구조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영화는 컨테이너선의 탄생, 삶, 죽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이전 작업들과 달리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곧장 전환되기에, 이전 영화들의 편집보다는 조금 더 내러티브적이라고 느껴진다.
PH: 내가 관찰하고 있는 이 장대하고 복잡하며 기계화된 세계의 연결성을 드러내기 위해,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편집하려고 의식했다. 내가 보여주는 활동 각각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하나의 포괄적인 쇼트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시각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SM: 치타공 장면은 19세기 미국 회화에 나오는 난파선을 떠올리게 한다.
PH: 맞다,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섹션을 생각할 때 주로 [윌리엄] 터너를 떠올린다. 터너의 ‘노예선(1840)’이라는 놀라운 회화 작품이 있다. 노예들이 배 밖으로 던져지고, 화재와 폭발이 담겨 있다. 끔찍하다.
선원으로 지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선박 해체 작업에 대해 인식해왔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산업임에도 말이다. 치타공의 그 해변은 흥미로운 예술 공원이자, 묵시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일종의 타블로이다. 치타공에 가기 전에 나는 〈스카가피요르뒤르〉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해당 아이슬란드 지역의 매우 깨끗하고 맑으며 순수한, 거의 환상과도 같은 풍경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그 경험과 산업적인 무언가를 충돌시키고 싶었는데, 내가 [현실로부터] 초월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박 해체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치타공에 갔지만, 촬영을 시작한지 몇 시간 만에 그들이 내 촬영을 중단시켰다. 내가 환경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치타공 촬영본은 위험에 처한 환경의 초상이다.
내 관심은 또한 미학적인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과거 그리고 산업화의 결과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오래된 공장을 사진 촬영하는 미학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것은 19세기 풍경화가들이 버려지거나 낡은 선박을 그리던 경향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한 때 조각가였고, 공간에 놓인 사물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기에, 치타공에 매료되었다. 나는 항상 선박들의 외양에 대해 감탄해왔다. 실로 매력적인 사물이다.
치타공에서 원래 하고자 했던 작업이 중단되었지만, 이 경험과 촬영본이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여름, 나는 한국으로 가서 조선소를 촬영했고, 그 다음 해인 2006년에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해를 떠났다. 나는 일련의 환경들을 미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삶의 사실로서 이들을 기록(documenting)하고 싶었다. 그 당시의 나는 제목을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World Works)”로 고려했었다. 우리는 조선 사업을 현대적이고 섬세한 산업 활동이라 여길 수 있지만, 선박들 자체는 폐기물이자 유해물질이 되어 제 3세계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바다에서〉의 세 부분들에는 은유가 내제되어 있다. 영화를 그 기원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내 관심에 대한 은유이다. 나는 치타공의 흑백 촬영본과 작업자들의 초상으로 영화를 끝냄으로써, 우리를 과거로 옮겨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SM: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을 말하는 건가?
PH: 정확하다, 〈바다에서〉의 끝은 활동사진 장치의 원초적 현상을 참조한다.
SM: 3부에는 1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메아리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각 파트 사이의 관계성을 얼마나 염두해두고 작업했는가?
PH: 내가 한국 옥포의 대우조선해양(DSME) 조선소에 갔을 때는 이미 치타공 촬영본을 수차례 본 상태였다. 하지만 그곳에 있을 때, 나는 이전에 촬영했던 것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만약 어떠한 연결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거대한 강철 구조물의 규모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쇼트에서 사람들은 선박의 종단면 안에서 작업 중이고, 한국의 쇼트에서는 접합되지 않은 [아직 제작 중인] 선박 조각의 종단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건설과 해체라는 두 과정을 관찰하는 것에 메아리가 내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SM: 한국 조선소를 촬영할 때 제한이 있었나?
PH: 한국에서 나는 놀라울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차량과 통역사, 그리고 내 조수로서 카롤리나[카롤리나 곤잘레스, 허튼의 아내]가 동행했다. 하지만 그 격렬한 산업 환경의 여건 때문에 사람들의 초상을 촬영할 수는 없었다. 내가 홍보팀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들이 몇 가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선박에 깊이 매료되어 있고, 선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예술적 호기심 그 이상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험과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은 내가 지나치게 탐사적으로 촬영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리고 열기가 너무 극심했다; 철제 조선소 안은 섭씨 43도쯤 되었고, 풋티지에서는 잘 감지되지 않겠지만 가스(fumes)도 있었다. 내가 겪었던 가장 격렬한 촬영 경험 중 하나였다. 두세 시간 정도 촬영한 후에는 그늘지고 서늘한 공간으로 가서 머리를 식혀야만 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조선소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헤아려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곳이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내가 작업한 것보다 더 큐비즘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표현하는 것이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보기 위한 충분한 거리만큼 멀리 떨어지는 것조차 매우 어려웠다.
SM: 두 번째 섹션에서, 어디에서 어디로 항해할지 어떻게 결정했나?
PH: 편의에 기반했다. 전세계로 식품을 운송하는 기업인 이스트웨스트 무역(East West Trade)사의 선적 대리인을 내 친구가 소개해주었다. 친구는 “너를 러시아 냉동선(reefer ship)에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다. 냉동화물선이다. (reefer-대마초로 혼동하지 마라.) 나는 겨울에 북대서양을 횡단하고 싶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내가 어린 시절, 우리가 처음 보았던 해양 영화는 〈바다에서의 승리〉(Victory at Sea, 1952-1953 NBC에서 방영된 TV 시리즈)의 에피소드들이었다. 병력, 식량, 그리고 무기를 실은 상선들을 동반하여 미군이 유럽을 향해 항해하는 것이 담긴 뉴스릴이었다. 〈바다에서의 승리〉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바다 중 하나인 북대서양의 “대권(The Great Circle)”을 겨울 중에 항해하는 영웅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했다. 나는 겨울 중에 대권을 항해하고 싶었고, 친구는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냉동 닭고기를 싣고 갈 러시아 선박을 예약해주었다. 나는 만전의 준비가 되어있었고 한 학생을 조수로서 데려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대권의 일부를 항해할 예정이었고, 나는 그 놀라운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정확히는 무슨 일이었는지 알 지 못한다. 출항하기 일주일 전에, 러시아인 소유주 중 한 명이 자신의 배에 미국인들이 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과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말을 친구가 전화로 말해주었다. 당시에 나는 〈다윈의 악몽〉[2004, 위베르 소페]을 보았는데, 러시아 비행기가 아프리카로 무기를 실어 나르고, 돌아올 때는 빅토리아 호수의 나일 농어를 가득 싣고 귀환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폭로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나는 이 영화가 그 회사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냉동 닭고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고 그들이 염려했는지 궁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항해에 동행하는 것이 거절된 직후 러시아에 조류 독감이 발발하여 냉동 닭고기 시장이 붕괴되었고, 그래서 선박은 잭슨빌을 떠났지만 시장을 찾지 못해 몇 주 동안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대기해야 했다. 결국 다른 시장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은 어쨌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화물을 운송해야 했다. 그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얼어붙은 상태였다. 20년만에 가장 추울 겨울이었고, 강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배들이 항구에 진입할 수 있도록 쇄빙선을 가져와 수로를 뚫어야만 했다. 나는 그 항해에 대해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먼저 2만 톤의 냉동 닭고기를 싣고 2주 동안 물 위에서 죽은 듯 표류하다가, 그러고는 얼어붙어 있는 것이다. 마치 B. 트라벤의 『죽음의 배(The Death Ship)』에 나올 법한 장면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화물선 탑승을 예약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회사를 발견했고, 거기서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배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실제로 항해를 떠났을 때는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바다는 잔잔해져 있었다. 내가 원했던 드라마를 얻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바다 부분 시작은 눈보라를 향해 항해하는 것이고,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배에서 지난 수 년 동안, 눈 내리는 걸 본 적은 없었다.
SM: 어디에서 어디로 항해했나?
PH: 몬트리올에서 함부르크로 갔다. 항구를 떠날 때 보이는 다리는 퀘벡 시에 있는 것이다. 훌륭한 항해였다. 20-30년 동안 바다로 나가는 배에 타지 않다가 다시 바다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에서 흥미로운 점은, 컨테이너선의 등장으로 해운의 특성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정 중 어떻게 촬영할지 많은 계획이 있었지만, 컨테이너선의 설계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폭풍우 동안에는 갑판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창문을 통해 촬영하면서 선교(bridge)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도 폭풍우의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얻을 수는 있었다. 날씨가 개고 해가 뜨자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컨테이너선은 사용 가능한 갑판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예전에 내가 일하던 배들은 훨씬 작고 전통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고, 전형적인 배처럼 생겼었다. 이번은 정말로 초현실적 경험이었는데, 산업용 퀼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선원들은 인도인들이었고, 그들은 환상적이었다. 내가 유일한 탑승객이었다. 10일 동안 인도 음식을 먹었고, 선장은 훌륭한 요리사였다. 그는 직접 내려와서 내가 지금껏 먹어본 것 중 가장 매운 살인적 새우 카레를 만들곤 했다. 나는 매일 장교들과 식사했고, 그들은 항상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내가 먹는 걸 관찰했다.
SM: 어땠나?
PH: 나쁘지 않았지만, 몬트리올에서 함부르크까지 계속 설사를 했던 것 같다. 이것에 대해 우리가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다에 다시 오게 되어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여정의 가치가 있었다.
마침내 풋티지를 확인했을 때, 내가 이전까지 촬영했던 것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예를 들자면, 배에는 둥근 모서리의 사각형 창문밖에 없었다. 내가 배에서 촬영할 때 원형 현창(porthole)은 언제나 멋진 프레이밍 장치가 되었지만, 이제 [원형의 디자인은] 구식이 되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통하여 촬영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은 관객들이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전 작업들을 참고하여 배의 부분을 통해 몇 개의 쇼트를 찍기는 했지만, 결국 완전히 다른 것을 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SM: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모든 부분에서, 당신의 시야가 이전과 달리 제한적이었다.
PH: 그렇기에 이 영화가 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촬영하면서 나는 관조적일 수 없었다; 각각의 모든 경우에서, “와,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한 한 빨리 포착해내야 해!” 이런 식이었다.
SM: 지난 30년 동안 당신의 영화는 흑백이었다. 〈바다에서〉에서는 넓은 색상 팔레트를 매우 편안하게 다루는 것 같다. 끝내 색상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PH: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약 15년 전부터 리버설 필름을 인화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리버설 필름으로 촬영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화가 문제였다. 나는 초기 영화에서 모두 흑백 리버설 필름을 사용했는데, 흑백 네거티브 필름으로는 얻을 수 없는 특수한 질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감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나 랩들과의 작업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랩들에게 더 익숙한 네거티브 필름으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작업이] 종착점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기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컬러로 전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허드슨강 밸리에 살고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허드슨강 화파(Hudson River School)의 회화 혹은 다른 풍경화가들의 작품에서 받는 감흥 때문에, 나는 색의 뉘앙스들에 점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더 어린 시절에 나는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1964)이나 다른 컬러 상업영화들을 보고는 했다. 그 색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필름메이킹을] 시작할 때, 색상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이 촬영하고 싶었고, 또한 상시 촬영하고 싶었기에 흑백으로 작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지금은] 컬러 작업 비용이 줄어들었다. 컬러 필름이 한 롤에 45달러, 흑백이 18달러이지만, 현상과 후반 작업 비용은 비슷해졌다. 좌우지간, 팔레트를 확장할 시기가 되었다고 느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조금 더 안정되면서, 내가 하는 일의 잠재력을 확장하는 방법으로서 가치 있는 투자처럼 받아들여졌다.
흑백에서 컬러로 이동한다는 것은, 현실을 추상화하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팔레트에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팔레트로 옮겨가는 것이다.
SM: 최근 몇 년 사이에 또 바뀐 점이 있다면 당신의 영화들이 더 길어졌다는 것이다. 〈바다에서〉는 60분이다. 더 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인가?
PH: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에서〉의 경우, 단일 작품군 대신 삼부작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내가 관심 갖고 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제가 더 넓어야 했다. 세 섹션 각각의 길이는 내 평소 작업과 비슷했다. 그리고 내 영화의 속도감은 여전히 거의 동일했다.
몇 년 전, 내가 전동 카메라로 전환했을 때, MTV, 가정용 컴퓨터의 도입, 다양한 발전들에 의해 문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했다. 심지어 할리우드 영화들도 점점 더 빠른 시간 감각과 짧은 지속으로 편집된다; 특정한 하나의 개념에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문화가 과도하게 가속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속도를 늦추고 그 흐름에 역행하고 싶다는 경향이 생긴다. 내 영화는 대부분의 문화 내에서 작동되는 것과 상반되게, 구조적으로 독창적이라고 느껴지게끔 만들어졌다.
또한, 풍경을 관찰할 때, 실제로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때가 있다. 변화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더 긴 쇼트가 필요하다. 짧은 쇼트에서는 세부적이거나 미묘한 것들을 인지할 수 없다. 내 영화에서는 각 쇼트가 그 자체로 작은 영화이다. 이것은 내 초기 영화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속 시간은 짧았지만, 각각의 개별적인 쇼트들은 그 자체로 시간 속의 독립적인 순간이 되었고, 후행할 순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비록 때때로는 [쇼트 사이의] 관계가 있기는 하다. 실은, 길게 지속되는 쇼트일수록 보고 있는 것이 이해되기 때문에, 인접한 다른 쇼트들과 더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SM: 나는 당신이 지난 10년동안, 당신의 작업이 갤러리 맥락에 부합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갤러리 전시는 당신에게 논리적인 가능성처럼 보이지만, 갤러리와 박물관은 DVD에 의존하고 16mm 상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PH: 나와 같은 세대의 필름메이커들은 그들의 작업을 선보일 다른 선택지들을 물색하고 있다. 접근성의 측면에서 아방가르드 영화 문화 내에는 내재된 한계처럼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계에서 내 작품을 위한 창구를 찾는 것은 합리적이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필름으로는 말처럼 쉽지 않다. 나는 〈타이탄의 술잔에서〉(1991)로 DVD 한 장을 만들었고, 이것은 산타모니카에 있는 갤러리인 쇼사나 웨인(Shoshana Wayne)의, 키키 스미스와의 쇼에서 전시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수집가들에게 판매했고, 이런 유형의 일에도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DVD에서 영화가 보여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화질이 아니었다.
갤러리가 잘한 점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독립된 공간과 의자를 구비해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큰 문제는 갤러리 공간에서 어떻게 영화를 제시하고, 어떻게 관람객들이 실질적으로 몰입하여 그 시간(timing)을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설치 전시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작품을 그저 지나쳐 갈 뿐, 작품이 요하는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으로서 경험되어야 한다. 그냥 지나쳐 가면서 엿볼 수는 있겠지만, 내가 건네고자 하는 것을 진정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