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리 스트로브의 오통에 대해

마르그리트 뒤라스
1971년 1월 14일 포리티크-에브도

일환 옮김
그 누구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영화로 뛰어들 때의 위험을 만끽하자. 우리들의 기준을 새로이 만들고, 자발적인 비평만을 신뢰하자.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는 비평이다. 우리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다른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우리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 혹은 장-마리 스트로브의 이름이 적힌 포스터나 리플렛만 보고는 곧장 그들의 영화를 보러 간다. 그들은 전문 비평가들에 의해 우리에게 공개되는 것이 금지되는 영화들을 만드는 필름메이커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영화들을 찾아볼 이유가 충분하다.

1964년, 위대한 명작 영화 중 하나인 드라이어의 〈 게르트루드 〉는 비평가들에 의해 살해되고 매장당했다. (파리에서 일주일간 상영되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당신, 비평가를 신뢰한 당신의 잘못이다. 이미 늦었다.

주목해라! 장-마리 스트로브**의 다섯 번째 영화이자 신작 〈오통〉*이 1월 13일 파리에서 개봉했다. 당신에겐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2주의 시간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고, 수익이 충분치 않으면 〈오통〉의 상영은 마무리될 것이다. 전문 비평가들이 〈오통〉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그들은 스트로브의 기획-작업의 본질을 보고 듣거나 이해할 능력이 추호도 없을 것이다. 이건 그들이 알아보지 못할 유형의 영화다. 그들은 순수한 지성의 텍스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며, 그들의 판단에 항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주어진 자유를 내다버린 것이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오통〉을 보러가라.

나는 지금 당신에게, 일면식 없는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스트로브의 영화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당신에게 〈오통〉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 영화가 〈게르트루드〉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게끔 나름의 최선을 다해보려는 것이다.

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렇게 본다: 1708년 이후로 무덤에 잠들어 있던 『오통』이 발굴되었다; 스트로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태동하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나는 기적처럼 루앙 출신의 사내[피에르 코르네이유]가 권력자들에 대한 격노에 잠긴 채 희곡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본다. 나는 이제 이해한다. 『오통』이 1682년부터 1708년까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단 서른 번밖에 공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해한다. 나는 이것이 권력과 권력의 내적 모순에 대한 희곡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알지 못했었다. 나는 늘 코르네이유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플랑숑이 연출한 『베레니케』는 예외지만) 라신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문화’라는 끝없는 중얼거림 속에 잠겨 있기에, 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그들의 드라마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오통〉을 보고나서, 그 작품의 폭력성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나는 코르네이유도, 스트로브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일은 나에게 처음이었다.

작품을 난해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명료함의 걸작이라 칭하는 것만큼 재앙적이다: 텍스트가 독자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차단해버리는 편견이 텍스트를 짓누르게 된다. 그 작품은 감금된다. 이 영화에서 스트로브는 그 두 감옥의 문을 열어 두었다. 〈오통〉은 당신의 시선보다 앞서 존재하던 다른 모든 시선들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드러난다. 코르네이유의 관객들은 이러한 자유에 익숙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스트로브 작업의 어려움으로 오인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텍스트는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낭독되지 않는다. 그것은 좋은 말하기나 나쁜 말하기가 모두 아니며, 내면의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운문(versification)은 배우들을 고양시키거나 도취시키는 것에 쓰이지 않는다; 배우들은 말을 가글하듯 내뱉지 않는다.

그 텍스트는 변증법적 전개, 호흡 리듬, 여백이다. 이것은 발화가 있는 모든 곳이 곧 극장이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인 텍스트, 예를 들면 생쥐스트나 맑스의 텍스트 이면에서도, 코르네유적 콘트라베이스의 박동이 자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의미를 은폐하는 권위의 억양인 코메디 프랑세즈식 억양을 제외한 모든 억양이 허용된다. 화면의 구도는 말에 의해 결정된다. 비극으로부터 물려받은 의례, 과장된 몸짓은 모두 소거되었다: 이곳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핵심을 겨눈다. 의미의 보편성이 되찾아진다. 스트로브는 코르네이유를 재발견하기 위해 과거로의 여정을 떠났다. 그는 비극, 그리고 그것의 문자적-역사적 의미 사이의 유착을 끊어냈다. 합리주의적 문화가 규정하고 고착화한 그 유착 관계를.

다시 말해, 그는 비극의 전복적(subversive) 차원을 복구했다. 그의 작업은 놀라운 치유이자 부활의 작업이다. 3세기 동안 『오통』은 범죄의 희생양이었다. 이제 『오통』은 생기 넘치게 되살아난다. 전복은 그 내부에도, 그리고 외부에도 존재한다. 이제 영화가 완성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서기 69년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 이 고지가 시간과 공간의 일원이다. 이 극적 공간은 로마의 차량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그 [차량들의] 점진적인 흐름은 점차 하나의 순수한 운동처럼, 마치 강이나 용암의 흐름처럼 목격된다. 우리는 두터운 차량 소음을 듣는다.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장소 중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존재할까? 이 차량 소음을 텍스트와 동시적으로 평행하게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감상일 것이다. 시대로부터 초월한 성스러운 공간이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 코르네이유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읽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영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고발하는 권력은, 차량들처럼, 지금 여기에 실재한다. 라쿠스가 말하듯, 그리고 모든 권력자들이 항상 말하듯: “우리만을 안전하게 지키고 그 나머지를 향해 비웃자. 우리에게 불리하게 굴러간다면 공익일지라도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고,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자.”

납으로 된 권력의 망토 아래에서 코르네이유를 읽는 자유로운 한 사람: 스트로브.



* 이 영화의 전체 제목은 코르네이유의 희곡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눈은 언제나 감겨 있기를 원치 않는다, 혹은 언젠가 로마도 때가 되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Les yeux ne veulent pas en tout temps se fermer ou Peut-être qu'un jour Rome se permettra de choisir à son tour)”이다. 

** 장-마리 스트로브는 프랑스인이다. (파리에서 개봉했던 〈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를 포함한) 그의 영화들은 독일 영화다. 스트로브는 알제리 전쟁 참전을 거부했기 때문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여전히 그의 뒤를 쫓고 있다. 그는 현재 서른여덟 살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바로, 우리 중 상당수가 오늘날 최고의 필름메이커라 여기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