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제이콥스와 니콜라스 레이 사이에서
래리 고트하임
일환 옮김
니콜라스 레이에 대한 찬사를 늘여놓는 래리 고트하임. 르누아르로부터 영향받은 너새니얼 도어스키. 무르나우, 미조구치를 보고 자란 로버트 비버스. 시트니가 서문을 쓴 마르코풀로스의 에세이집을 읽어보면 그 또한 그리피스, 스트로하임, 스턴버그, 드라이어 등, “영화”들로부터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계보를 이해하는 것은 아버지를 뒤따르는 반동성 따위가 아니라 본인이 놓인 곳의 자장을 이해함으로써 주위를 뚫고 나갈 전망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로트링겐 사이트에 올려둔 마르틴 루세의 인터뷰에서도 그녀가 동일한 말을 한다. 당시는 비디오가 영화를 참칭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무성시기 혹은 고전기 할리우드 프로세스를 거쳤던 감독들에 의한 “영화“로부터의 감각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이 있다. 자라나며 자연스레 이들의 언어를 체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 동시대 (전분야) 영화들의 통점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부터 제작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제도화되었다. (독립)산업영화와 실험영화 는 서로 작별한 사이가 된 듯하다. 이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작업들 혹은 새로움보다는 끔찍함에 가까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작업들,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바이다. 지반을 나누어 밟고 있는 이들이 그 땅 이면의 지층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며칠 전 친구들과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을 출발 삼아, 니콜라스 레이와 켄 제이콥스가 한 데 엮인 이 글을 옮겨보게 되었다.
관객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에 대한 시상이 이뤄졌다. 순회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들은 선정된 수상작들을 상영하도록 되어있었다. (그 시절에는 진정한 교육에 대한 지원이 가능했기에) 나는 뉴욕주 벤 뒷좌석을 가득 채워, 출품된 영화들을 모두 빙엄턴으로 가져와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꾸릴 수 있었다. 우리는 예심을 위해 두 대의 동시 영사기를 설치했고, 섬세하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모건 피셔, 어니 기어, 조이스 윌랜드, 그리고 홀리스 프램튼의 영화를 발견했다. (내가 오벌린에 있고 홀리스가 클리블랜드에 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는데, 그가 이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랐었다.) 그리고 켄의 〈창문〉(Window) 그리고 〈가랑비〉(Soft Rain)도 발견했다.
정말 근사한 시절이었다! 대학에는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이 존재했다. 나는 영문과에서 시인 앤 섹스턴을 초청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영화를 만들 계획을 논했지만, 그녀는 아마도 프레더릭 와이즈먼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하퍼 필름 소사이어티(Harpur Film Society)를 운영하며, 관객들이 선호하며 기대하는, 미모의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대중적인 “지적” 프랑스 영화들 사이에 요나스 메카스의 〈영창〉(The Brig), 앤디 워홀의 〈카우치〉(Couch) 그리고 고다르의 영화들을 포함시켜 관객들의 충격과 짜증을 유발했다. 각 프로그램에 필수적인 “단편 영화” 대신 우리는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을 상영했다. 우리는 독립 필름메이커 경연 출품작들로 여러 프로그램을 꾸려 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했다.
1967년, 나는 셜리 클라크를 첫 초청 필름메이커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작 〈제이슨의 초상〉(Portrait of Jason) 그리고 뉴욕 필름메이커스 코옵의 실험영화들로 가득 찬 캐리어를 가져왔다. 하퍼(나중에 빙엄턴 대학으로 통합되었다)는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나는 그 중 한 곳의 지도교수였다. 그들은 큰 규모의 예산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켄을 그 대학의 게스트로 초청하여 일주일 동안 내 영화 수업에 참여하게 했다.
그의 방문에 앞서 한 상자의 영화들이 먼저 집에 도착했고, 미리 상영해볼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나중에 정말 좋아하게 되고 큰 영향을 받게 된) 피터 쿠벨카의 〈아르눌프 라이너〉 그리고 켄의 〈블론드 코브라〉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블론드 코브라〉는 내가 이전에 보았던 그의 형식적 미니멀리즘 영화들과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했다. 밥 플라이슈너의 영화를 아무런 맥락 없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켄은 [그의 부인] 플로와 [그의 딸] 애기 니시와 함께 도착했고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의 방문은 시간, 수업 일정, 요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한밤중이거나 수업이 없는 일요일, 잠겨 있는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보안팀을 불러야 했다. 그는 마치 피리꾼 톰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장을 펼쳐 보이며 기꺼이 그를 따르려는 학생들을 이끌었다. 그 경험의 장은 언더그라운드 영화, 음악,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 그리고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와 같은 장편 영화들을 망라했다. 나는 그의 방문 기간 동안 그 영화를 여러 번 상영했다. 켄은 당대에 불었던 고다르 열풍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들은 밤에 산다〉와 같은 영화는 고다르와 켄이 모두 좋아했던, 미국 영화에 대한 관심사가 드물게 일치하는 지점이었다. 예를 들어, 켄은 필름 누아르의 팬이 절대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나는 뉴욕에서 계속 켄을 만났고, MoMA에서 열린 〈톰, 톰, 피리꾼의 아들〉 초회 상영에 함께 가기도 했다. 한편, [대학 내] 상주 시인 밀턴 케슬러가 나와 함께 필름 소사이어티를 운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전 [켄의] 방문을 후원했던 레지덴셜 칼리지의 기숙사에서 24시간 동안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많은 상영에 불법적 에로티시즘의 전율이 감돌았다. 밤늦게 학생들이 기숙사에 모여 영화 속 나체를 볼 수 있었던 곳은 여기뿐이 아니었다. 뉴욕에서의 상영들은 더욱 그러했다. (나는 알도 탐벨리니의 빌리지 게이트 극장에서 입석만 허용되는 상영으로, 브루스 코너, 로버트 넬슨의 감성적인 영화들을 상영했던 것을 추억한다.)
영사기에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연극과 소유의 극장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필요했지만, 그 누구도 지지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학내 영화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인문학부 교수진은 반대했지만, 학문적 영역 확장의 가능성을 감지한 (영문학, 미술, 연극) 학과에서 영화의 옹호자로 나서며, 전문성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학과 내 프로그램이나 학제간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싶어했다. 이전까지는 필름 소사이어티나 새 프로젝터 안건에 대해 전혀 지지해주지 않던 이들이었다. 나는 생명력 없는 학내 프로그램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독립적인 학과를 신설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문득 구색만 맞추며 영화에 관여했던 교수진보다는 영화 창작에 열정을 쏟았던 켄이 훨씬 더 자격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켄과 나를 함께 교수진으로 두는, 별도의 학과를 신설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불안정한 제안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켄은 퀸즈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에서 고단한 시간제 강사직을 막 그만둔 상태였고, 전통적인 학위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이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당시 총장이었던 브루스 디어링이 진정으로 비전 있는 행정가였다는 것이다. 이 기관에서 그러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고 마지막이었다. 몇 년 후 그는 랄프 호킹을 대학에 데려왔는데, 그는 혁신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조적이었다. (디어링의 아들은 랄프가 도예를 가르치던 앨리게니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었다.) 랄프가 하퍼에 왔을 때 그는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착 이후 그는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시판용 포타팩(portapk)으로 시작했고, 후에 친구인 백남준에게 영감을 받아 변혁적인 비디오를 만들게 되었다.
둘째는, 당시 여전히 MoMA에 있던 윌라드 판다이크가 캠퍼스를 방문해, 켄에게 매우 관대한 추천서를 써주었다는 것이다. 이 추천서는 켄이 전통적인 학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덮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나중 같았으면, 그런 전통적이지 못한 이력 때문에 그는 후보군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MoMA에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초회 상영을 계획하고 있었고, 나는 몇 달 뒤 켄과 함께 그 상영을 보러 가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영화학과가 창설되었고, 반대하는 인문학부 교수진도 있었지만 반강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나는 학과장이 되었고, 켄이 교수진 일원이 되었다.
첫 강좌는 1969년 여름 나와 어니 기어가 가르쳤다. (나는 독립 필름메이커 경연에서 그의 영화를 처음 본 후, 뉴욕에 있는 그를 찾아가 친구가 되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1년 동안 휴직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았고, 그 시기는 내 영화 작업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다. 그 해에는 켄 혼자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우리는 인문학과의 행정 보조였던 시인 로버트 파블리코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학내 프로그램을 마련해냈다. (그는 그 다음 해 잔혹한 노바스코샤 해류에서 딸들을 구하려다 익사했다.)
켄은 나의 혹은 자신의 제자가 될 학생들을 세대에 걸쳐 배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프로그램은 핵심적으로 영화의 미학과 감수성을 다루는 2년 과정이었다. “영화 입문” 수업으로 시작했는데, 새로 지어진 수백 명 규모의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 수업은 같은 강사가 2년간 연이어 맡았다. 학생 수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처음보다 훨씬 헌신적인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내가 휴직했던 첫 해에 켄이 강의를 시작했고, 나는 그 다음 해에 내 학생들과 함께 시작했다. 1년 후 학생들은 영화 제작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반 8mm(이후에는 슈퍼-8)로 시작하여 16mm 무성영화로 발전해 나갔고, 수년 동안 내 전문 분야였던 16mm 유성영화 제작으로 나아갔다.
켄의 혁신 중 하나는 Kalart-Victor 16mm 영사기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영사기는 프레임 단위로 멈춰 스틸 사진을 영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영사기는 고장도 빈번하고 과도하게 사용되던 16mm Kodak 분석영사기(analytic projectors)로 대체된다. 이들은 영화의 창조적 분석을 위한 우리의 필수 도구였다. 켄은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을 만들 때 Kalart 영사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분석용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를 위해 이러한 유형의 영사기를 사용했고, 이 방식은 그의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작업에서 계속 진화해 나갔다. 나에게는 이 도구가 단순한 교육용을 넘어서, 무비올라(Moviola)와 스틴벡(Steenbeck) 플렛베드 편집기를 활용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구성 작업으로 이어졌다. 16mm 필름을 수시로 망가뜨리는 불편한 영사기를 분석과 편집 수단으로 활용해야만 했던 어려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를 다루는 영화 강사들은 이 난관을 거의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켄의 강사로서의 탁월함은 자신 주변에 일종의 자기장을 형성하여, 그 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로 하여금, 켄의 놀라운 표현들이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었다. 우리는 자기 작품의 관객을 찾는 영화 예술가들을 위한 “언더그라운드 철도”의 주요 정거장이었다. 많은 초청 예술가들이 왔을 때, 켄은 마치 그들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처럼 주위의 반응을 유도했고, 학생들은 이러한 [켄의] 개인적 경험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참여했다. 오늘날 뉴욕 도처의 행사에서도 이와 같은데, 켄이 참석하면 그는 자신의 열렬한 호응으로 토론을 지배한다. 이것은 강력한 미학적, 감정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초청 예술가가 식상하게 준비된 발표에 함몰되지 않고 완전히 몰입한 채 말할 수 있게끔 하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학생과 관객이 켄의 맹렬한 반응이라는 필터를 거쳐 작품에 반응해야만 하고, 그저 침묵으로만 남을 수도 있는 자신들만의 반응을 찾아낼 기회를 잃기도 한다. 켄이 참석한 상영회에 수년 동안 관객으로 참여해본 나조차 이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관객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면, 전체 발표는 그저 지루할 뿐인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켄은 여기서 그들의 관여를 종용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 개인의 심원한 참여일까, 혹은 켄의 정신과 열정에 의해 여과된 참여일까?
켄이 개혁하고 고수했던 학과 프로그램의 핵심 중 하나는 졸업 심사였다. 이는 1년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젝트로, 학생들의 창작 활동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은 영화 분석과 영화 제작을 균등하기 다루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비평적이거나 학술적인 프로젝트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영화 창작 프로젝트였다. 초기에는 (당시 수백명의 학생이 있던) 학과 전체가 대형 강의실에 모여,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교수진(처음에는 나와 켄, 후에는 초빙교원 혹은 정식교원)이 그들 앞에서 작품을 비평했다. 많은 학생들이 이 시련에 겁을 먹고는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1년 혹은 그 이상 휴학하기도 했다. 때로는 정말로 탁월한 발표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성공적인 학생들조차 이후 예술가로서의 길을 이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일부 미술 대학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대학원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전성기 샌프란시스코 예술 대학의 경우가 그러했다. 빙엄턴 프로그램은 일반 종합대학의 학부 전공 과정으로서 그렇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수했다.
빙엄턴은 영화 예술의 모든 측면에 개방적인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기에, 초기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초청되었다. (켄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스탠 브래키지와 피터 쿠벨카 외에도, 최근 미국으로 넘어온 체코 필름메이커인 밀로스 포만과 이반 파세르, 그리고 D.W. 그리피스의 연구자이자 첼시 호텔의 개성 넘치는 거주자였던 시모어 스턴이 방문했다. 뉴욕영화제에서 첫 실험영화로 〈초른의 보조정리〉(Zorn’s Lemma)를 상영했던 홀리스 프램튼은, 인근 셰낭고 카운티에 농장을 구입했고 빙엄턴을 자주 방문하여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agomena)의 여러 부분을 촬영했다. 미디어 스터디스 버팔로(Media Studies Buffalo) 프로그램이 생기기 전까지 그가 영화과의 앞날에 있어 유력한 [교수진] 후보가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왜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마침내 세 번째 교원을 선발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우리 모두가 동의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필름메이커들, 심지어 켄이 옹호했던 브래키지와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해서도 켄은 반대 의견을 냈다.
켄의 영화, 그리고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교수로서의 역량에 대해 미묘하게 의문이 생겨나면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무렵, 《필름 컬쳐》지의 어느 글 각주에서 니콜라스 레이가 프랑스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실직하고 뉴욕에 거주 중이라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나는 그 글을 쓴 사람에게 연락했고, 그는 나에게 니콜라스 레이가 아내 수잔과 함께 살고 있던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와 켄은 모두 〈그들은 밤에 산다〉를 좋아했다. 또한 학과를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혁신적인 실험영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공유했기에, 켄도 그에게 연락하는 것을 지지했다. 나는 뉴욕에서 수잔과 함께 니콜라스를 만났다. 그는 막 데니스 호퍼와 함께 〈마지막 영화〉의 편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고려해보라며 빙엄턴에 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스의 방문은 몇 년 전 켄의 방문과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했다. 켄이 대학의 표준적인 시공간적 규범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논스톱 마라톤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면, 니콜라스는 대학이 보유한 모든 장비를 꺼내오게 했다. 그중에는 뉴욕주에서 잉여 장비로 확보해두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이 장비들을 총동원해 모두를 매료시키는 웅장한 행사들을 마라톤처럼 연이어 만들어냈다. 켄과 나는 언제나 학과를 바라보는 비전에 있어 높은 이상을 공유했고, 니콜라스를 초청한 것은 그 비전이 강력하게 일치되었던 순간 중 하나였다. 다행히 행정진 중 일부가 여전히 대학을 혁신의 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 열려 있었기에, 우리는 니콜라스를 교수로 채용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1971년 여름, 켄이 뉴욕에 있는 시기에 도착했다. 그는 베스탈에서 우리와 살다가 보건소 건물에 딸린 방문객 아파트로 이사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그는 〈베개 밑의 총〉(Gun Under My Pillow)이라는 장대한, 부분적으로는 자전적인 영화 프로젝트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다음 학년도에 학과 내 큰 균열이 발생했다. 부분적으로는 학과 장비 사용과 관련된 문제였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가능한 모든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었다. 나는 주요 영화제작 수업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이를 조율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했던 것은 학생들의 충성심에 관한 문제였다. 켄의 강한 개성과 교수로서의 뛰어난 역량으로 인해, 교실 밖에서도 그를 따르는 학생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니콜라스 또한 점점 아웃사이더 집단 같은 핵심적인 학생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니콜라스는 베스탈에 농가를 하나 구해 그들 집단과 자신의 영화 작업을 위한 중심지로 삼았다. 한편 중립을 지키려는 학생들도 여전히 있었고, 나에게는 양쪽 진영 모두에 소속되거나, 혹은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않는, 감정적 갈등을 피해 움직이는 좋은 제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뛰어난 학생들은 켄과 니콜라스 중 누구를 따를지 결정해야만 했다.
다음 해에는 즐거운 통합의 순간이 있었다. 뉴욕 주립대 전체를 아우르는 대학 연합 예술 축제가 빙엄턴에서 주최되었다. 영화 행사에 방문한 이들 중에는 빙엄턴의 라이벌로 부상 중이던 미디어 스터디스 버팔로를 운용하는 제랄드 오그래디, 그리고 MIT의 리처드 리콕도 있었다. 리콕은 우리가 상영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무성영화였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그의 업적은 동시녹음 기술의 사용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축제의 주요 행사는 니콜라스의 미완성 작품을 슈퍼-8, 16mm, 35mm로 동시에 상영하는 것이었다. 그 작업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장 완전한 발표였다. 외부 세력이 방문한 그 자리에서, 우리 세 명의 빙엄턴 교수진 예술가들 사이에는 강력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해당 상영 후 베스탈에 있는 내 시골집에서 우리 셋과 몇몇 학생들의 모임은 나의 영화 〈지평선〉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학생 마크 골드스타인이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보다 긴장된 순간을 담고 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장비와 시설 사용에 관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학과 회의였다. 이 시기의 많은 행사들이 그러했듯, 회의는 학생들 앞 대형 강의실에서 진행되어 연극적인 면모가 있었다.
현시점에서 이 사진을 보니, 나는 두 가지 강력한 힘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성격 차에 의한 갈등이 아니었다. 나는 양자 각각에게 내적인 끌림이 있었고, 이것은 내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유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는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ies)* 연작에서 장대한 서사 그리고 형식적 설계 사이의 긴장으로 반영되었다. 결국 내 운명은 켄과 함께 하는 것을 택했고, 한 해 더 격렬한 갈등을 겪은 뒤 니콜라스는 떠났다. 나는 이후 오랫동안 켄과 나란히 작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그런 차이점이 아니라, 양립 불가한 라이벌이자 적대자가 된 그들 사이의 어떠한 친연성(kinship)이다.
* 역주 - 순서대로 〈지평선〉, 〈비문증〉(Mouches Volantes), 〈네 개의 그림자들〉, 〈지식의 나무〉가 《선택적 친화력》 연작의 I, II, III, IV편이다.
니콜라스의 천재성은 잠재력 있는 배우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초월하는 연기를 하게끔 이끄는 것에 있었다. 그의 영화에서 예를 들자면, 〈그들은 밤에 산다〉의 조직력 강한 주요 배우 그룹에서부터 〈실물보다 큰〉의 제임스 메이슨, 그리고 〈이유 없는 반항〉에서 찬란하고 훌륭하게 작업한 배우들, 제임스 딘을 비롯해 데니스 호퍼, 살 미네오, 나탈리 우드를 포함한 배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의 능력은 촬영 외적으로 배우와의 실제 관계를 포함하여, 그들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그들이 위대한 퍼포먼스를 하게끔 이끄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켄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또한 퍼포먼스에 관한 것이며, 때로는 2차적, 3차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켄이 잭 스미스와 함께 만든 영화들은 단순히 켄이 잭을 “연출”(directing)했다기보다는, (물론 우리가 당시 촬영 세션의 역동성과 그 이면의 맥락을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촬영이 끝난 후 그것을 재구성(redirecting)한 작업에 가깝다. 심지어 〈블론드 코브라〉처럼 실제 촬영이 다른 사람(밥 플라이슈너)에 의해 이뤄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초창기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잭 스미스”는 잭이 자신의 퍼포먼스에 구현했던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페르소나의 분신이지만, 그 페르소나는 이제 또다른 아이러니한 힘에 의해 지배되는, 켄의 복잡한 상상 속 피조물로 변형된다.
켄의 명작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이미 타자에 의해 기록된 원본 퍼포먼스를 재구성한다. 그의 많은 “신경시스템” 작업들이 파운드 풋티지를 활용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켄이 좋아했던) 브루스 코너의 영화들이나, 켄에게 있어 중요한 또다른 영화인 조셉 코넬의 〈로즈 호바트〉가 활용했던 파운드 풋티지와는 다르다. 켄의 작업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는 쇼트와 쇼트의 병치 혹은 쇼트들의 시퀀스에 있지 않다. 그는 쇼트들 간의 유의미한 관계나 초현실적 충격을 위한 변칙적 병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셀룰로이드 위에 존재하는 가상 인물과 퍼포머를 집요하게 깊이 탐구하고 변형하여, 우리가 일반적인 삶과 퍼포먼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숭고하게 초월된 영역으로 이끈다. 그렇게 도달한 상태는 우리를 켄의 개인적 지복(Bliss)에 가깝게 이끈다. 그러나 신경시스템 작업들은 단순히 켄이 이미 “머리 속에 갖고 있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도 그 현상(phenomenon)은 필름스트립과 영사기라는 “기계”들과 신경시스템의 재현을 통해서만 가시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물리적 공격성을 통해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억, 연상과 함께 신경계를 작동시킨다. 그의 그림자놀이(shadow play) 작업들에서, 그는 학생들을 그림자로 만들어, 켄과 관객들의 시선이 굴절되는 3차원 초현실 세계 속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퍼포먼스를 하며 “투영”되게끔 했다.
니콜라스는 살아있는 그의 페르소나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니콜라스는 사람들을 자신의 아우라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되면서도 니콜라스의 상상에 따른 피조물로 변하게끔 했다. 이것은 교수로서 켄의 역할이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 그리고 두 자기장 사이에서 교수로서 나만의 독자적인 역할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었다. 그 관점에서 두 사람에 대한 비교의 사유를 시작했었다. 이 시기는 내가 예술가로서의 방향성을 찾던 때였고, 대규모 내러티브와 형식 실험 사이의 장력이 나를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10년에 걸친 작업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의 강력한 힘이 심리적으로 나에게 더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내면의 그림자이자 약물 의존적 캐릭터인 〈실물보다 큰〉의 제임스 메이슨이 점점 더 통제 불능이 되듯, 켄의 메타-퍼포먼스도 그의 정신적 에너지 의해 작동되며, 우리를 고속의 플리커 폭풍 속으로 끌어들여 그 경험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고 되찾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심리적 에너지 충돌이 내 영화 작업의 동력이었다.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점차 더 역동적인 작업으로 나아갔다. 이 갈등의 형식적 요소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소는 《선택적 친화력》 속 숨겨진 요소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