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판더르쾨컨
프란스 판더스타크
1980
일환 옮김
요한 판더르쾨컨 작성
문으로 살짝 미끄러져 들어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싱크대와 히터 사이, 공간이라곤 없는 그곳으로 사라진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신문을 반쯤 펼친다. 거의 읽지 않는다. 신문을 덮지 않는다. 다시, 신문을 덮지 않는다.
가스계량기가 보인다. 검침원이 아니라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다. 유리문이 조심스럽게 다시 닫힌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아무래도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가야 할 길을 상세히 설명한다. 앉아 괴로워한다. 시소 위에서 균형을 이루는 순간. 모든 것들이 허공에 떠 있다. 발목, 헐렁한 양말, 약간 짧은 바지, 우아하게 균형을 이룬 엉덩이, 낡고 낮은 굽의 구두. 그녀는 다정하게 곁눈질하고, 이어 작은 연 하나를 날린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바라보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이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관문 앞, 마찬가지로 목소리들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보인다: 그는 어색하게 빛 아래 홀로 서 있고, 은퇴한 무용수인 그녀는 햇볕이 잘 드는 보도 위에 자리한다.
서로를 견딜 수 없는 두 문 사이 좁은 통로에 갇힌다. 그곳에서 빠져나간다. 밤을 향해 열린 창문들, 푸른 어둠으로 뛰어들기를 망설이다가, 뛰지 않는다. 나무와 석고로 된 방에서 사랑의 수학을 연습한다. 정적 속에서 귀를 기울인다.
속삭이지 않는다. 찬장 속 잔들이 튀어나와 깔끔한 식탁을 장식한다. 먹지 않는다. 탁자 주위에서 연기한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 드러나고 부숴진다. 문이 닫히고, 다시 열린다.
바다, 웅덩이, 발, 피부, 모래 언덕과 구덩이. 한 쌍의 연인이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다.
각자가 각자의 이유를 대고 함께 말한다.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르게끔 한다. 따로 함께, 함께 따로, 각자가 공동으로 존재한다. 함께 창조하고, 속삭이지 않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적게 말한다. 더 적게 말한다. 훨씬 더 적게 말한다.
때마침 쉰켈(Schinkel) 강변을 따라 이야기 나누며 다가오는 한 쌍, 그리고 내 좌측에서 반쯤 보고 듣다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사람. 이들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무기, 독점, 이윤에 대한 [발화자가] 보이지 않는 텍스트는 여전히 내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며, 이를 위한 공간은 [화면 안에] 여전히 남겨져 있다. 그 텍스트는 내가 수년 동안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것은 더 모범적이지 않은, 즉, 더 인간다운 다른 한 쌍에 의해 말해진다. 그들은 내 오른쪽 귀 쪽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오른쪽의 붉은 문을 지나쳐 다시 [화면 밖으로] 나간다. 붉은 문, 잠재적 맑시즘의 영역, 배경과 세트는 여전히 시선 속에 남아있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흥미로우며, 강력하다. 그러나 프란스가 그 한 쌍의 계획된 속삭임으로부터 무엇을 의도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억양으로, 어느 정도의 가청도로 말하게끔 했는지는 정치 혹은 전술의 문제다. 그것은 취약한 순간들을 효과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전술이며, 순수한 형식을 타락시키고, 자유를 제한하고, 손을 더럽히고, 더러운 세계를 깨끗한 이미지 내로 끌어들여 [이미지를] 정치화하려는 전술이다. [그는] 때로 이러한 난점을 제쳐둔다.
큰 경첩, 존재의 풍차, 열대 정원의 밤에 놓인 두 겹의 경첩. 두 개의 의자 위를 빙글 도는 두 개의 문장. 두 몸이 분리된다. 말하고, 닿고, 떨어지는 것으로만 그들은 함께 문장을 만든다. 과업과 자유는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촌스러운 무용 선생*을 잊지 말자. 그는 바삐 다음 이미지, 두꺼운 양모 카펫 위에서 먼지를 찾는 그의 연인의 이미지를 향해 서둘러 질주해간다. 그리고 [둘이 만나 함께 나오는 이미지에서] 춤을 추며, 그가 얼마나 부드럽고, 그들을 관통하는 불확실성에 얼마나 깊이 사로잡힌 채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가.
또한 재능 있는 트럼본 연주자이자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이웃**도 기억하자. 그는 작은 모자를 쓴 사랑스러운 이웃 여성과 함께 너무나 서툴고, 어설프지만, 사랑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우리가 다시금 가벼워질 때 찾아올 여름도 잊지 말기를. 프란스 판더스타크보다 진정한 셀룰로이드의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결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완고하면서도, 그 무엇도 가로막지 않는다. 폭탄도, 객석에 앉아있는 평범한 관객들 마저도 가로막지 않는다. 그는 열어둔다. 하나의 문을.
* 역주 - 마지막 문단의 네 번째 문장부터의 묘사는 요한 판더르쾨컨(무용 선생) 본인과 연인 노슈카 판더르렐리가 직접 출연한 장면을 지시한다. 푸른 목초지와 붉은 파라솔 주위에서 둘은 대사를 내뱉으며 율동한다. 해당 장소는 총 네 번 영화 안에서 사용되는데, 두 번은 쾨컨 부부가 출연하며 다른 두 번은 트럼본 연주자 이웃 부부, 즉 베르나르 푸네킹 부부가 출연한다.
** 역주 - 판더르쾨컨 커플과 같은 장소에서 대구를 이루는 이들은 베르나르 푸네킹(Bernard Hunnekink) 커플이다. “판더스타크의 영화 음악을 자주 작곡한 베르나르 푸네킹은 판더르쾨컨의 음악을 작곡한 빌럼 브뢰커르 콜렉티브의 트럼본 연주자였는데, 이 관계를 통해 둘은 1980년 서로의 영화, 판더스타크의 〈미완의 튤립〉 그리고 판더르쾨컨의 〈장인과 거인〉에 대해 감상을 교환할 수 있었다.”[아카사카 다이스케, 「네덜란드의 거장」 중]
요한 판더르쾨컨의 〈장인과 거인〉에 대하여
프란스 판더스타크 작성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의뢰를 받고 연기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허구”다. 이 “허구”를 다루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1) 배우에게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행동을 강제하여 최대한 허구성을 감추려는 방식. (2) 허구성을 의식하고 감지할 수 있게끔 만들고, 오히려 이를 강조하여 구조화하는 방식. 〈장인과 거인〉의 힘은 배우들이 연출되는 특수한 방식, 즉 허구성이 투명해지며 이르는 진정성에 있다. 이 진정성은 곧 배우들의 노동과 노력이다. 그들은 매우 이목을 끄는 자세로 배치된다. 그들이 내뱉는 텍스트 또한 그들이 특이하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게끔 유도한다. 그들이 말하는 각 문장은 고유한 멜로디를 내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배우들에 대한, 배우들의 노고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마주하게 된다.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례가 인형 제조 장면이다. 한편에는 “허구”, 단순히 강제된 것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실제 인형 제작자의 섬세한 수작업이 있다. 이러한 노동과 환경의 감각적인 접촉은 튀니지에서 촬영된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이 장면은 연출된 장면과의 직접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올리브유 추출 작업의 모든 과정과 시장에서의 분주한 움직임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영화 속 배우들의 작업에 대한 내부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본 영화의 본질적인 측면은 사회-경제적으로 판이한 서로 다른 두 문화 속에서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때때로 일부 대화 중 음악이 지속되는 것이 거슬렸다. 나무들과 더불어 있는 큐브의 근사한 장면조차도 너무 많은 음악이 사용되어 장면의 힘을 약화시킨다. 영화 속 과도한 음악, 그리고 이보다는 덜한 정도이지만 과도한 편집, 이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너무 가까워지는 위험을 초래한다. 영화를 세심히 관찰하는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손상될 위험이 있다. (그 자유는 [판더르쾨컨의] 〈하얀 성〉(1973)과 〈읽기 수업〉(1973)에서는 매우 강렬히 느껴진다.) 요약하자면, 영화가 만들어질 때 가졌던 대담함이 편집의 마지막 단계와 음악 삽입 과정에서 다소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영화감독이 관객의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