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tch Masters: Frans van de Staak’s  Rooksporen and Johan van der Keuken’s Face Value
네덜란드의 거장: 프란스 판더스타크의 연기의 흔적 그리고 요한 판더르쾨컨의 페이스 벨류


아카사카 다이스케 赤坂太輔
2011년 11월 6일

일환 옮김
일본의 영화 프로그래머이자 비평가, 아카사카 다이스케(赤坂太輔)는 《뉴 센츄리 뉴 시네마》(New Century New Cinema) 시리즈를 통해 영화사적으로 유의미한 프로그램들을 일본 내에서 선보였다. 산드로 아귈라르, 프란스 판더스타크, 페터 네슬러, 하룬 파로키, 라울 루이스, 알렉산드르 레크비아시빌리, 루돌프 토메, 장-마리 스트로브, 요한 판더르쾨컨 그리고 장-클로드 루소의 영화들을 상영했고, 이와 관련된 다수의 글을 작성했다. 2019년에는 첫 저서인 『프레임 - 모던 시네마에 의한 미디어 비평』(Frame - media criticism by modern cinema)을 출간했다.
A 연기의 흔적) 사무실 혹은 학교 강의실과 같은 장소, 닫힌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드리운다. 몇 명의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다. 전경의 남녀는 서있고, 후경의 남녀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다. 카메라가 흔들리거나 이동함에 따라, 영화가 프레임을 고려하여 인물들을 엄밀하게 배치해 두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들은 마치 카메라맨 앞에서 공연을 리허설 중인 것 같다. 정장 차림의 단 한 남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상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크림색 혹은 백색 벽에 맞춰 중성적이거나 눈에 띄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고 있기에, 선별된 인물들로 짐작된다. 그들은 방 안에서 정장 차림의 한 남성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긴 머리의 여성에 대해 차례대로 진술한다. 그들의 말은 여성의 행실에 대한 세부 사항을 묘사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도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그 무엇도 설명하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자기반영적인 것처럼 들린다. 여성은 옆방에서 크레용을 잡고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남성이 그녀에게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물을 때마다 다른 그림이 나타나며, 이의 세부 묘사가 아무런 결착 없이 반복된다…

B 페이스 벨류) 그리 강하지 않은 햇살 아래, 반나체의 남성 그리고 흰 셔츠를 입은 여성이 흰 프레임의 침상 위에 누워있는 클로즈업 쇼트.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녹색 나무들을 배경 삼은 채 카메라를 응시한다. 핸디헬드로 촬영된 점프컷의 연속에서, 그들은 포옹하고 서로의 뺨과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진다. 때로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때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화면 밖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온다. “수술이랑 치료를 받고나서 힘이 좀 돌아왔어… 이제 일을 좀 해야지…” 갑자기, 외화면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려 말한다. “이것은 내 사진집 ‘생제르맹데프레’에 나오는 남녀를 떠올리게 하지.” 여성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이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의사가 에드에게 시한부 진단을 내렸을 때, 우리는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러나 그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졌어요.” 카메라는 떨어져 있는 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푸른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두 명의 네덜란드 영화감독, 프란스 판더스타크와 요한 판더르쾨컨은 (슬프게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놀랍게도 이들은 암스테르담에서 서로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01년, 채 다섯 달도 차이 나지 않게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스트로브는 판더스타크를 “지가 베르토프의 유일한 계승자”라 칭했으며, 스트로브-위예의 77년 작품 〈모든 혁명은 주사위 던지기다〉는 판더스타크에게 헌정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말라르메의 텍스트를 다중의 인물들이 낭독하는 방식은 판더스타크의 영화를 참고한 것이었다. 요한 판더르쾨컨은 〈우리는 17살〉과 〈파리 모르텔 르투슈〉를 통해 사진작가로서 처음 주목을 받았고, 영화감독으로서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세르주 다네에게 “JLG, JMS, JVDK을 추가해야 한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대화문을 남긴 친구이기도 했다. 판더스타크의 영화 음악을 자주 작곡한 베르나르 푸네킹은 판더르쾨컨의 음악을 작곡한 빌럼 브뢰커르 콜렉티브의 트럼본 연주자였는데, 이 관계를 통해 둘은 1980년 서로의 영화, 판더스타크의 〈미완의 튤립〉 그리고 판더르쾨컨의 〈장인과 거인〉에 대해 감상을 교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 그들은 〈연기의 흔적〉(1992)과 〈페이스 벨류〉(1991)라는 걸작을 만들게 된다. 2001년 유럽 영화제에서 판더르쾨컨은 15명의 영화감독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추천하는 행사, “15X15”에서 〈연기의 흔적〉을 선정했다. 〈페이스 벨류〉와 〈연기의 흔적〉의 관계는 일찍이 한스 베이레캄프에 의해 언급된 바 있었다. 그러나 두 영화를 더욱 상세히 비교해보면, 그들이 판이한 방식으로 이미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예상치 못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유는 우리가 매일 같이 다루는 가장 간단하고 일반적인 유형의 이미지, ‘얼굴과 말’, 이 조합이 갖는 자명함(obviousness)을 비판함으로써 선사된다. 

먼저 B) 〈페이스 벨류〉는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해체, 걸프전 시대를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초상 모음이다. 요한 판더르쾨컨은 이 영화를 본인의 가장 도전적인 작품 중 하나라 단언한 바 있다. 영화는 암스테르담, 베를린, 마르세유, 런던, 프라하 등 무작위적 장소에서 만난, 유명 무명 모든 계층 사람들의 현재에 대한 인터뷰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장면B의 등장 인물은 이 영화가 헌정된 감독의 친구, 에드 판더르엘스켄 부부이다. 그들은 [사진집] 『생제르맹데프레의 사랑』의 사진가다. 이 영화는 85%가 클로즈업 쇼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90년대 유럽을 표상하는 듯하다. 장-뤽 고다르는 “요한 판더르쾨컨은 이미지를 교향곡이나 협주곡처럼 조직하고,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공적 장소를 연구하며 고전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요한 판더르쾨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굴, 얼굴의 연속: 그것은 하나의 궤적이다. 단어, 문장, 슬로건, 대화의 조각, 의견, 실험, 음악의 파편, 환경음, 공장 소리,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음악과 섞인 목소리, 명쾌한 목소리,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 더듬거리거나 눈물 섞인 목소리, 노래처럼 격양된 목소리: 이것이 또 다른 하나의 궤적이다. 시각적인 선과 청각적인 선은 주로 자체적으로 움직임을 발전시키다가 때로 서로 합쳐진다. 이 두 가지 궤적은 특수한 동역학에 따라 각자의 구성 법칙을 따르지만, 그들 사이의 가까워짐, 멀어짐, 영구적인 긴장관계, 충돌과 결합을 통해 공존한다.
사운드 트랙에 대한 정보는 주제상의 요구에 따라 분류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모든 목소리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면서도, 그 안에는 또 다른 장소의 의미, 또 다른 기억, 그리고 또 다른 ‘멀리 떨어진 나라와 이방인’이 자리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지배적인 맥락에서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이 사랑의 배경에서 지배적 요소로 작용한다. […] 이것은 목소리의 오케스트레이션이다. 텍스트는 의미를 전달함과 동시에 일종의 음악을 구성해야 한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 마찬가지로 음악이어야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사운드와 이미지는 때때로 별도로 녹음/녹화될 것이다. 때로는 촬영 상황과 무관한 대화 중에도 그렇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사운드들도 녹음할 수 있었다. 사운드는 항상 다양한 길이의 파편으로, 몽타주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이미지와 사운드가 항상 별도로 녹음/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이 둘이 동기화되어 순간적으로 단절이 제거된다.” (1988년 3월, 〈페이스 벨류〉에 대해 판더르쾨컨이 쓴 글에서)

 여기서 설명되고 장면B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는 아마도 판더르쾨컨의 사진가로서의 출신, 즉 판더르엘스켄의 사진집에 있는 포토 스토리처럼 사진과 부기(附記)된 텍스트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침묵의 순간〉은 60년부터 63년까지의 암스테르담 풍경과 사람들의 파편을 그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 보여주는 영화인데, 일찍이 그 침묵과 리드미컬한 움직임 자체가 내러티브 없이도 사진과 영화의 차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혹은 콕토 그리고 클루조를 연상시키는, 그의 친구인 시인이자 코브라(CoBrA) 일원의 화가 뤼세버르트에 대한 영화, 〈뤼세버르트 – 시간과 작별〉(1962). 해당 영화에서 존 콜트레인의 ‘Chasing the Train’ 색소폰 포효를 배경음악 삼아 뤼세버르트가 자작시를 낭독한다. 그리고 이를 빠른 컷전환의 흑백 이미지들로 드러내는데,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는 움직임과 정지의 대위법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붓의 움직임 그리고 회화의 창작 현장과 대면하는 뤼세버르트의 얼굴, 영화 시작 아틀리에에서의 후진하는 움직임 그리고 영화 끝자락 부동 촬영의 연속. 세르주 다네는 이렇게 말했다. “요한 판더르쾨컨은 찰리 파커나 버드 파웰이 연주하듯 촬영한다… 색소폰을 불듯이. 그는 모든 프레임을 속주한다. 팬은 테마이고, 데카드라주는 리프이며, 르카르다주는 코러스다…”

 〈페이스 벨류〉는 얼굴과 그 주변만을 프레이밍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음에도,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는 각 요소를 더욱 자유롭게 조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무작위로 선택된 파편들은 문학적 및 의미론적 맥락 그리고 그 너머에서 대위법을 구성한다. 분장한 아이들이 등장한 후, 판더르쾨컨 본인이 “렌즈 없이는 보이지 않아…”라며 카메라를 향해 중얼거리는 장면, 카바레에서 춤추는 여자 댄서의 하얀 화장과 눈부신 조명, 이주 노동자의 검붉은 피부와 그림자, 병에 절망하는 노인, 결혼식을 올리는 행복한 연인, 마르세유 우익 집회의 소란, 그리고 폴란드 유대민 묘지에 묵묵히 헌화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만남과 헤어짐, 죽음과 탄생, 노래와 중얼거림, 빛과 그림자. 깊은 바다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는 물결이 감동적인 것도 바로 그 대위법의 ‘음악성’(musicality)에 의해 관통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판더르쾨컨은 암을 앓아 카메라를 장시간 메기 어려웠을 것인데, 이로 인한 끊임없이 불안정한 프레이밍과 짧은 쇼트를 쌓는 방식은, 외려 피사체를 포착한다는 행위의 위험성을 우리가 느끼게 한다. 〈우물 위의 눈〉 속 인도 무술, 〈암스테르담 글로벌 빌리지〉의 태국식 복싱 등, 격투기를 통해 드러나는 ‘육체’ 그리고 붉은 빛이 도는 ‘피부’, 이것은 네덜란드 영화 전반에 걸쳐 편재하는 요소이며 심지어 할리우드에서 만든 파울 페르후번의 〈쇼걸〉과 〈할로우 맨〉에서도 나타난다. 이 영화는 ‘얼굴을 찍는’다는 (위험성 높은) 형식적 제약을 설정했기 때문에 그 요소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 또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분리됨으로써 발생하는 인물의 익명성, 진실의 불확실성, 그리고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태도, 이들도 그 강렬함의 이유다. 이 영화, 〈페이스 벨류〉에서, 병에 걸린 부부의 포옹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는 장면, 여기서 각각의 의미를 초월하는 관능성은 바로 음악성에 의해 확보되는 자유로부터 창출되는 것이다.

반면, 프란스 판더스타크에게 신체와 프레임 간의 관계는 보다 엄중하고 근본적인 요소다. 우리가 《뉴 센츄리 뉴 시네마 Vol. 1》[아카사카 다이스케의 스크리닝 시리즈]에서 상영할 수 있었던 〈세피오〉, 이 단편은 후기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이 극단적으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부자유의 형식성을 승계하면서도, 그것을 세계와 조우하는데 활용하여 더 확장적인 것으로 초월해낸다. 〈온순한 여인〉에서 〈돈〉에 이르기까지,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조차 외면 받았던 브레송의 후기 영화들은, 각각의 구도를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최대한 회화에 가깝게 만들고, 그 완결성이 무너지는 일시적 순간에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령, 〈온순한 여인〉에서, 다리 위에서 갑자기 사랑을 깨달은 남자가 집으로 되돌아와 도미니크 상다의 무릎 뒤쪽에 매달린 씬, 혹은 〈돈〉에서 창살 너머로 절묘하게 겹쳐 보이는 부부의 뒷모습으로부터 이를 엿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판더스타크는 한 소녀가 씻고, 그림 그리고, 요리하는 일상적인 몸짓을 촬영한다. (브레송이 그러했듯) 얼굴에 특권이 부여되는 것을 프레이밍을 통해 거부하고는, 프레임 안의 몸, 손, 발이 통제되지 않는 자연, 시간과 만나는 관능적인 순간을 담아낸다. 팬에 담긴 초콜릿이 녹고 있는 한 쇼트는 통제된 손의 움직임과 형태의 용해가 마주하며 자아내는 서스펜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연기의 흔적〉에서 배우들은 한 명씩 카메라 앞에 나타나 한 여성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하고는 방을 빠져나간다. (영화의 출연진은 장-뤽 고다르의 〈마리아에게 경배를〉에 출연한 요한 레이센 같은 유명 배우도 있지만, 대부분 아마추어 배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방을 나가 걸어갈 때, 카메라도 잠시동안 그들을 뒤따르며 함께 이동하다가, 끝내 배웅하고 떠나보낸다. 한편, 넓은 방 옆의 다른 방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책상에 앉아 있다. 여성은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심문을 받고 있지만, 그 경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 심문자는 탐정, 판사, 혹은 정신과 의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신원은 불분명하다. 여성에 대해 증언하는 26명의 남녀조차도 그들이 각각 어떠한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평상복’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있고, 체형도 특징이 없으며, 직업도 특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이 뱉는 여성에 대한 증언들은 결정된(solid) 이미지를 형성하지도 못한다. 한편 여성은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코브라(CoBrA) 그룹의 일원이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그 그림 또한 결정된 이미지에 이르지 못하고 매번 다르게 드러난다. 심문자가 무엇을 그리고 있냐 물을 때마다 그녀는 “물의 심장” 혹은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처럼 답할 뿐이다. 그러자 한 증인이 말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리디 판마리싱의 미상연 연극을 원작으로 한 〈연기의 흔적〉은 소위 재판 영화의 핍진성(verisimilitude)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언뜻 보기에는 연극 공연의 리허설을 촬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증인들은 클로즈업부터 롱쇼트까지 다양한 쇼트 사이즈로 촬영된다. 그들은 종종 여성의 인상을 묘사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환각에 사로잡힌 독백을 행하는 것처럼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연극의 실황 중계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오’뿐이다. 사람들의 증언과 퇴실로 인한 발화와 무언의 반복이 자아내는 리듬, 실내에서 실외로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밀폐감에서 해방되듯 들려오는 소리의 반복, 그리고 책상과 심문자에 둘러 쌓인 여성의 독백은 점차 가속화되면서 길어져만 가고, 심지어 중얼거림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베리만의 영화와 다르게, 설정과 대화의 내용은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관객은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더욱이, 적어도 자크 두아용의 영화처럼 ‘사랑에 관한’ 영화라 여길만한 여지도 없다. {비록 두아용의 80년대 영화들은, 드레이어, 포드에서 리베트, 스트로브-위예, 올리베이라로 이어지는 상연-영화(theater-cinema)라는 범주 하에서, [사랑 영화가 아닌] 현대 영화로서 다시 논의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다. 화면 안에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구도나 조명도 부재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안정할 때, 관객은 그저 영화가 연주하는 섬뜩한 리듬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몸짓, 대화, 그리고 침묵이다.

판더스타크는 (1994년에) 말했다. “전기적(biographical) 세부 사항과 확인 가능한 일화 없이는, 그 사람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그들은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또는 그들의 말이 지닌 신비의 힘에 의해 존재한다.” 하지만 걸어가던 심문자가 점프컷으로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처럼, 그 현전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별다른 특징 없는 이미지가 무섭도록 추상적이고 심지어 유령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날것의 강력한 힘이 관객을 사로잡아두는 법이다. 〈페이스 벨류〉 속 익명의 얼굴과 말 역시 그러했듯, 이 사람들의 얼굴과 말 또한 분명히 카메라와 마이크에 의해, 시간 속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연기의 흔적〉에서 관객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것은, 익명 배우들의 몸 그리고 공간의 연속성(continuity)을 통한 ‘음악성’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것에 가장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현전하는 것으로 대체하고는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프란스 판더스타크는 자체 제작, 극히 적은 예산과 [가용] 인원으로, 아무도 만든 적 없던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감독의 전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적인 꿈이 있지만, 이름[유명세]에 의하여 현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마저 쉽사리 조작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그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