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판더르쾨컨
프란스 판더스타크
1977년
김동건 옮김
이어질 대화는 9월 14일 일요일 아름다운 가을 오후에 진행했다. 주로 스피노자 영화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더해, 판더스타크는 그의 작업 전반의 방향과 동기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근시일 안에 연구될 수 있길 바란다. 그 중에서도 4분 분량의 짧은 영화 《소나테》(Sonate, 1975)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프란스: 그는 렌즈깎이였다. 그게 생업이었다. 하루종일 렌즈 깎는 데 여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알려진대로 그는 범신론자였다. 말하자면, 그는 신을 세계와 분리된 인격으로 보지 않고, 신과 세계를 서로 동일시했던 것이다. 유대교 공동체는 그를 무신론자로 여겨 파문했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내 관심을 끌었다. 삶을 버텨내고 존속하는 그 방식이 말이다. 그의 사유 방식은 가혹한 구석이 있다. 생각을 개진하고 리듬화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나는 이런 리듬이 내 영화에도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에게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조악한 정식화이긴 해도, 말하자면 이게 스피노자의 전부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이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는 방식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게 분명하다. 결코 결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요한: 스파노자는 ‘행복하다’는 사실에 어떤 윤리적 가치를 덧붙이지 않나? 오늘날 우리는 아주 절박하게 묻는다. 어떻게 ‘나의’ 행복을 좇을 수 있을까? 정말 그걸 좇아야 한다면 말이지.
프란스: 음, 그래... 스피노자에게 행복은, 그러니까 ‘나의’ 행복은 언제나 타인과 관계되어 있다. 이기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단적으로 사실이니까. 그는 이걸 아주 명확히 언급한다. 지금 나보다도 훨씬 명확하게: 한 사람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기쁨에 참여한다. 그 반대도 역시 참이다: 증오가 만연할 때, 한 사람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다.*
* 역주 - 스피노자는 존재 보존을 추구하려는 보편법칙으로서의 충동 혹은 욕망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이른다. 코나투스가 증감함에 따라 인간은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선’(Goodness, 좋음)이란 이러한 본성적 욕망에 유익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의 견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말초적인 쾌락주의 또는 단적인 이기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 a. 스피노자가 말하는 ‘참된 선’은 감정 및 틀린 관념 아래 숨겨져 있으므로, 욕망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선 은폐를 점검하고 극복해야 한다. b.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늘 타자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나를 비롯한 다른 것들 전체를 고려할 때만 진정한 기쁨에 이를 수 있다. 말하건대, “인간에게 인간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4부 정리18의 주석)
요한: 그렇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사회적 대립이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어젯밤에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저항운동 대회에 참석했다. 남아프리카와 앙골라에서 온 대변인들은 투쟁을 호소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유일한 평화의 지침은 오직 증오의 길 뿐이라고.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양측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선 논증은 좀 궁색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프란스: 맞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에 처음 증오를 불러온 자들은 다름 아닌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을 만든 그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 시스템은 비인간적이다. 그에게 인간의 영역이란 행위의 자유를 위한 충동과 결합해있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자유로운 행동을 억압당했다. 따라서 그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을 전복하려고 나설 때, 그때 그들의 투쟁은 합리적인(rational) 토대를 얻게 될 것이다. 이들의 행동에 증오는 필요하지 않다. 증오는 단지 잉여적이다.
요한: 그런 시각이 좀 순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프란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간 앞뒤가 맞지 않나? 시스템을 공격하는 이들은 [사실] 증오에 차 있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을 생각해보라. 나는 베트콩보다 미국인들이 더 격렬하게 혐오에 사로잡혀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스피노자의 생각에 가까이 있고 싶다... 자기보존과 행위의 자유를 위한 충동이 여전히 가장 강한 동기일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요한: 나는 좀 의도적으로 이런 주제들로 대화를 이끌어 보려고 한다. 당신의 영화들은 역사적인 텍스트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프란스: 스피노자 영화 뿐 아니라 《후베르트 코르넬리스존 포트의 10편의 시》(Tien gedichten van Hubert Korneliszoon Poot, 1975) 역시 17세기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나의 조국 나의 나라》(Meine Heimat mijn vaderland, 1976)는 독일의 2류 작가 프리드리히 그리제(Friedrich Griese)의 1932년 텍스트를 사용했다. [‘Meine Heimat’과 ‘mijn vaderland’는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로 대략 ‘나의 조국, 나의 나라’에 상응한다.] 《나의 조국》의 경우 나는 작가의 그런 개인적 배경보다는 해당 텍스트에 더 관심이 있었다. 뭐, 전부 과거의 텍스트들인 건 사실이지만, 현대적인 장비로 녹음하면서 이것들을 오늘의 시점으로 옮겨두는 것이다. 잘 알겠지만, 현실적인 것은 이미 영화 안에 나타나있다. 촬영에 사용한 기술적인 수단이든, 배우의 연기이든, 날씨든... 이런 다양한 조건들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이미 현존해있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드는 일의 핵심적인 동기는 이것이다: 역사의 더깨아래 감춰진 그것이, 현실 사태에 저항하기에 충분히 강력한가? 포트 영화에서, 자연 풍경을 지속적으로 주무르면서 나는 이런 측면을 더 두드러지게 포착했다. 예를 들자면, 색칠한 커다란 시트가 두 개의 장대 사이에 매달려 바람에 파도친다. 이때, 혹자는 시트의 움직임이 곧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오늘은 바람이 저쪽에서 불어오는군.
그럼, 다시 스피노자의 텍스트로 돌아가서. 나는 텍스트를 마치 악보처럼 디자인했다. 카메라 앞에서 실연되도록. 이때, 이 텍스트들이 어떻게 현존하는 소리의 세계에 저항하는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촬영 장소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 이를테면 차들, 사람들, 새들, 비행기, 바람 소리가, 텍스트에 파열로 작용한다.
요한: 특히 사운드에 관심이 있었나?
프란스: 음, 사실 아니다. 다만 사운드는 그걸 보여주는 한 가지 방식이지.
요한: [텍스트를] 악보처럼 취급했다고 하지 않았나?
프란스: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는 그의 철학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모형화했다. 정리와 증명들을 이용해서. 영화 역시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스피노자의 명제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조합했다. 어떤 부분은 몇 차례 반복되기도 한다. 약 스무 명의 배우가 있었는데, 전부 비전문 배우였다. 나는 사전에 이들의 등장 빈도를 무척 정밀하게 계산했다. 나는 이런 문제에 천착하는 편이다. 뭐, 말하자면 1번 배우는 영화에 열 번 등장하고, 19번 배우는 딱 한 번 등장한다든지... 한 프레임에 동시에 나오는 사람 수도 때마다 다르다. 어떨 때는 한 사람이 혼자 텍스트를 말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대여섯명이 함께 읽기도 한다. 텍스트가 늘 사회적인 환경에서 말해지기 때문에 일종의 대화체로 형성된다... 유사-대화편(quasi-dialogue)인 셈이지.
** 역주 - 『에티카』로 흔히 알려진 스피노자의 윤리학 저서의 원제는 『기하학적인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이다. 그는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기하학적 필연성에 따름을 가정하고, 피상적인 우연성을 인간의 지적 결함의 산물로 일축하였다. 신을 곧 자연(Deus sive Natura)으로 간주하는 그의 범신론은 거칠게 말하자면, 세상 만물의 존재를 그 자신 나름의 필연적 ‘원인’에 귀속시키려는 ‘수학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요한: 분배(distribution)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엄격하게 산정된 사람들에게 텍스트를 분배하면서, 그걸 공동 자산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같다.
프란스: 정확해. 유사-대화편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의미가 더해진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텍스트를 발화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이 있게, 어렵게, 또는 격렬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의미가 지속적으로 변한다. 뭐, 보다시피... 텍스트를 악보처럼 대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텍스트의 분배, 배우와 로케이션은 그 안에 고정되어 있다. 다행히도, 편집 단계에서 요소들을 구성할 충분한 기회가 있긴 하다.
요한: 물론이다. 최종 프레임 조합은 편집을 통해 결정할 수 있겠지. 결국 문제는 여러 단계에 걸쳐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촬영 마지막 단계에서 온갖 계산과 계획의 결과물을 배우한테 넘겨준다. 그러면, 당신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뜻밖의 리액션들과 유동적인 상황에 노출될 것이다. (물론, 당신은 통제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이런 게 비전문 배우와 일하는 이유일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나.)
프란스: 영화에서 점점 문제시되는 건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다. 영화는 어떤 사유의 방식, 사태를 다루는 감각―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활동에 몰입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요한: 스피노자 영화의 몇몇 씬에 당신이 직접 출연한 게 무척 인상깊었다. 짧은 텍스트를 맡았던데, 무척 버거워하는 것 같던데. 영화에서 가장 큰 클로즈-업 쇼트이지만, 간략함과 연약함을 예화하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겸손해 보인다. 다른 배우들처럼 당신도 똑같이 [대사] 실수를 한다. 이런 면에서 당신 영화는 좀 ‘날것’이다. 거침없이 실수를 다루고 있으니까. 포트에 대한 영화에서도 이 점이 어느정도 공식화된 것 같다. 배우 도널드 드 마르카스(Donald de Marcas)는 종종 “아니야, 잘못 했어”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처음부터 다시 대사를 시작한다. 당신은 이런 순간들을 잘라내기는커녕,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집어넣었다. 이 점에 있어 《나의 조국》은 더 극단적이다. 배우들 중 한 명이 텍스트를 까먹었을 때,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화면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마도 적어둔 텍스트를 다시 읽는 거겠지.) 그리고 촬영 중인 프레임 속으로 다시 들어와서, 연기를 계속한다. 실패의 스트레스라고는 조금도 없다. 쇼트는 방해받지 않은 채로 끊김 없이 이어진다.
프란스: 음... 말하자면, 그런 걸 ‘잘못’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배우는 우선은 시나 철학 텍스트 같은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촬영하는 순간 그 자신의 현실성이 보다 강력해서, 표현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배우의 실수를 포착하는 문제가 아니다. 배우나 주변 환경에 내재한 힘이 극에 개입하고, 촬영과 간섭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어떤 순간에는 역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완벽히 겹쳐지기도 한다. 이 순간들이야말로 탁월하다.
요한: 그런 순간들에 텍스트는 완전히 살아있는 것 같다. 당신의 영화들은 시공간을 특정한 방향으로 착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을 지각하되, 공간에 연장된 것으로 이해하도록 말이다. 이런 개념은 쇼트 편집 방식을 통해 가시화된다: 무척 거칠고 정밀한 점프컷들이 아주 길게 지속되는 쇼트들 사이에 들어간다. 또, 행위의 장소와 시간에 따른 텍스트의 취약함. 로케이션 위에 현존하는 사운드. 혼자서, 몇몇이 또는 여럿이 함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장식 속에 눕거나 앉거나 서있는 방식들. 그 순간 경관의 빛. 때때로 회화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구성. 색칠되어 있거나 되어있지 않고, 파도치거나 파도치지 않는, 시트의 존재.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의 특징들이 한데 모여 당신의 영화 전체를 시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영화제작의 상식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어서, [의도적으로] 저항의 요소를 예화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프란스: 흠, 나는 영화감독은 혁명적인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본다. 스스로가 혁명적인 인간일지라도. 이 혁명적인 시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그러나 여전히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감독은 영화를 ‘가능한 잘’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뻔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혁명을 이끌고자 한다면, 많은 이들에게 이롭도록 해야만 하지 않나...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말이다.
요한: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렇게 독특한 작업 방식을 촉발하는 것인가? 그 배후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촬영이 임박할 때 나는 분노에 의해 움직인다.
프란스: 음, 이렇게 말해보지: 나는 분노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스피노자와 포트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소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위 환경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나의 테마인 것 같다. 포트나 스피노자에게나 어떤 형태의 열망이 있었다...그리고 나에게도 같은 게 있다. 이렇게 말하려니 좀 겸연쩍기는 하다만. 그래, 이게 정확한 단어인 것 같다. 열망, 나는 분노가 아닌 열망에 의해 움직인다. 이 또한 아주 강한 정념임은 물론이다. 열망은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의 긴장 속에서 발생한다. 소통의 실패 또는 개인적인 문제에 의해 말이다. 스피노자와 포트는 이런 열망을 가졌다. 어쩌면 나도 그렇고. 이 정도면 답이 됐을 것 같다.
요한: 그러니까, 그런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란스: 나는 그냥 하나의 문학 작품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문학은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연결해주니까. 그걸로 영화를 만드는 순간, 그건 직접적인 것이 된다. 촬영하는 그 순간은, 낭송하는 배우들에게조차도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직접성은 화면에 고정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건 다시 간접적인 것이 된다. 바로 이 고정 행위를 통해 일종의 도약으로 하나의 원을 완성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간접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요한: 그렇군. 하지만 이게 열망이랑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
프란스: 음, 간접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을 연결하는 과정에 이 열망을 위치시킬 수 있다. 열망한다는 것은 소통의 간접성을 함축한다. 실체적인 거리감을 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꽃을 보낸다면, 그건 무척 간접적인 방식으로 ... 표현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런 방식으로 열망은 그 최고조에 이른다. 열망의 가장 까다롭고 가장 강렬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가장 간접적인 부분 말이다. 어쩌면 이게 내가 저 역사적인 텍스트들을 고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 텍스트들은 내게 이것들을 풀어낼 기회를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