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리 스트로브
박규재 옮김
프란스 판더스타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었고 그가 (암스테르담의)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프랑스인 장-클로드 루소와 독일인 페터 네슬러와 함께 유럽의 3대 시네아스트 중 한 명 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그의 영화가 유일하게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를 계승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엘리오 비토리니가 1947년 6월 27일 금요일 프랑스어로 레 레트르 프랑세즈에 썼던 것처럼 “파시즘, 즉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폭력으로 모든 문화를 파괴하려 한다.
프란스 판더스타크는 1965년 뮌헨에서 화해불가를 수급하기 위해 내게 편지를 썼고 (당시 그는 16세였을 것이다.) 그는 1965년 암스테르담의 한 극장에서 3주 동안 영화를 상영하는 데 성공했다. 위대한 신이시여, 우리는 이제 어찌 되리오! 아니면 사부아 보좌신부가 말했듯 이렇게 말하겠지. 오 위대한 존재여! 오 위대한 존재여!
장-마리 스트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