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실케 팬스
인터뷰이: 제임스 베닝
2009년 11월 4일
김동건 옮김
JB: 그런 견해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나의 첫 영화는 《풍경 자살》(Landscape Suicide, 1986)이다. 그때 나는 정말로 주체가 풍경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함수라고 생각했다. 버나뎃*은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지역에서 살았지만, 그녀의 가정은 가난했다. 계급적 고립이 존재하는 그런 사회적 풍경에서, 소녀는 무척이나 겉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 다음에, 영화 2부에 등장하는 에드 게인*은 위스콘신의 겨울 속에서 살고 있다. 풍경과 기후 때문에 그곳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농장에서 혼자 지냈다. 그러니까 버나뎃과 에드 게인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어느 정도는 그들이 살던 장소에 따른 함수였던 셈이다. 그리고 버나뎃의 경우, 사회적 풍경과 계급 격차의 풍경이 실제 [지역의] 풍경과도 또한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집은 비교적 가난한 동네에 있었고, 낡고 퇴락했는데, 이에 비해 무척 부유했던 동급생들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에드 게인은, 그의 물리적 풍경 속에, 그러니까 길고 외로운 겨울 내내 눈과 추위 속에서 자기 오두막에 홀로 갇혀있었다. 즉 이 영화는 당신의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다―적어도 답하려고 하는 것 같다―혹은 적어도 같은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듯하다.
* 역주 - 《풍경 자살》 1부의 모델이 된 소녀. 그녀는 실존인물로, 동급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 역주 - 《풍경 자살》 2부의 모델이 된 연쇄살인마.
SP: ‘캘리포니아 삼부작’의 엔딩 크레딧에는 마치 그것들이 주체(subjects)라는 양 [영화의] 장소와 풍경을 나열했는데, 이것들이 사람 못지 않게 당신의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여기고 있나? 우리가 풍경의 일부라면, 대지 역시 주체인 것인가?
JB: 그래, 내 생각에도, 그게 엔딩 크레딧의 의도였던 것 같다. 《13개의 호수》(13 Lakes, 2004)에서 나는 호수들의 이름을 나열했고, 《루르》에서도 일곱 개의 쇼트가 각각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캘리포니아 삼부작’의 크레딧은 그곳의 실황을 보고하고 있다. 근처의 작은 도시는 어디이고, 땅의 주인은 누구이고 하는 것들을. 어쩌면 소유를 통해 풍경을 정치적으로 독해하는 것인데, 달리 말해, 땅을 가진 자와 그 땅에서 노역하는 자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된 노동은 이미지에, 이윤을 얻는 자들은 크레딧에 나타난다. 특히 ‘캘리포니아 삼부작’에서 나는 풍경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각각의 영화들에서 풍경이 어떻게 주인공으로 기능하는지 물론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풍경들은 각자 저마다의 감각을, 흡사 인격(personality)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서사(narratives)를 가지려고 하는 우리의 욕구를 지시한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엇에 대해서건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13개의 호수》에서도, 관객은 “카메라 도는 동안 감독은 뭘 했을까?” 같은 서사를 가질 수 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이러한 서사적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그런 서사를 지시하고자 크레딧에 [풍경의]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관객의 마음에 언어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런 자그마한 목소리가 있는 셈이다.
SP: 그래서 학생들에게 대상에게 주관적인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대상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이유로 고정된 카메라를 선호하는 것인가? 카메라가 너무 많이 움직이면,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볼 수 없게 되니까. 주관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가? 그것에 너무 집중하면, 다른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JB: 그러하다. 대부분 나의 쇼트들은 카메라를 제외한 모든 것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고정되어 응시하기 때문에, 관객은 움직이는 모든 걸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예시는 《루르》에서 상륙하는 비행기들인 것 같다. 고정된 응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신생 디지털 미디어는 완전한 ‘움직임 없음’을 가능하게 한다. 필름은 영사하거나 촬영할 때 덜덜대기 마련이고, 디지털 카메라만큼 부동(stillness)을 잘 담아낼 수 없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을 땐,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필름 그레인이 없다보니, 디지털 영상은 프로젝트 슬라이드처럼 보인다.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관객은 진정으로 부동을 접하게 된다. 그러다 작은 잎사귀 하나의 움직임이 인지된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을 때 어떤 것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화면 위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름에서라면 결코 그렇게 감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SP: [필름에는] 항상 이미지의 움직임이 있으니까.
JB: 그렇지. 특히 그레인의 움직임이. 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의식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지나는 순간 이미지 전체가 움직임으로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비행기는 기상 환경의 변화를 몰고 오기 때문인데, 그게 나를 무척 들뜨게 했다. 기상 환경이 잦아들면 이미지는 다시 쥐 죽은 듯한 정적으로 돌아간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작은 나뭇가지 같은 것 하나가 아까의 여파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건 다음 비행기가 나타날 때까지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전에 멈출 수도 있다. 극도로 정적인 프레임에서는 이렇게 매우 섬세한 탐구를 해 볼 수 있다. 나는 항상 그걸 바라왔지만, 제대로 성취해 본 적은 없었다.
SP: 비행기가 나뭇잎을 움직이는 《루르》의 이 쇼트에서, 당신은 생태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인가?―비행기가 보이지 않게 될 때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영향을 알 수 있다는? 대지를 생태학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디지털 비디오의 부동성이 더 적합한가? 오직 이미지 자체가 정지해 있는 경우에만 우리는 사물의 움직임을 볼 수 있고, 따라서 [디지털에서는] 그러한 변화들이 보다 명시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JB: 그것도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더 깊고 더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사물이 더 깊고 더 섬세하게 드러날 수 있을 테니까. 인간과 풍경의 관계에 대한 사실들은 이제까지 드러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이 쇼트는 그 실례이다. 또한 고요한 날에 촬영을 하지 않으면 비행기가 기상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촬영 전에는 이런 영향을 생각해 본 바 없었는데, 운 좋게도 실시간으로 그걸 관찰할 수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엄청나군, 디지털 영상에 잘 담기고 있으면 좋겠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필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나타나 보였다. 나도 이제 더 오래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어떨 때는 변화가 목격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SP: 《루르》의 한 시간짜리 쇼트에서 코크스 공장 굴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도 계속 다르게 보인다.
JB: 그래, 그건 해질 녘 햇빛에 비친 방식 때문이다. 수증기는 햇빛에 비치며 변화하고, 하늘은 해가 저묾에 따라 변화한다. 두 가지가 동시에 변하는 셈이다. 하나를 다른 하나에 대비시키고 있는데, 실은 함께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그게 작업의 한 부분이었다. 또, 나는 코크스 제조 과정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대략 이런 건데, 우선 석탄을 고로에 스물다섯 시간 동안 굽는 것이다. 그리고 ‘푸쉬 작업’을 통해 석탄을 고로에서 운반차로 밀어낸다. 운반차는 트랙을 따라 냉각탑 아래로 이동한다. 그런 후 70초 동안 일만 갤런의 물을 그 달궈진 석탄 위에 쏟아부으면, 코크스가 된다. 이 70초의 냉각 과정 동안 수증기가 배출되는 것이다. 냉각탑에는 일련의 격벽이 있어서 수증기에 섞인 불순물들을 거를 수 있는데, 하늘로 배출되는 증기는 따라서 거의 순수하다. 물론 모든 불순물을 거르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우리가 가진 최선의 필터 시스템이다. 이런 일이 10분마다 일어난다. 가끔은 석탄을 평소보다 오래 굽기도 하는데, 이 경우 공정이 좀 지체된다. 따라서 촬영 당시 나는 첫 10분의 중간쯤에 녹화를 시작했다. 그래서 약 5분 뒤에 처음 수증기가 나오고, 다음엔 온전히 10분을 기다린 후 두 번째 수증기가 나온다. 세 번째에는 석탄을 조금 더 오래 구워서, 거의 한 번을 건너뛰고 20분 가량 기다린 후에야 수증기가 나온다. 따라서, 매번 조금씩 더 오래 기다리게 되는 셈이다. 그 후에도 [수증기가] 두 번 더 나오는데, 아마 8-9분 정도로, 조금 더 빨라졌던 것 같다. 그렇기에 기다림 속에 모종의 긴장이 생긴다. 이 한 시간짜리 쇼트에 20분 동안의 정적이 있는데, 이때 하늘이 꽤 많이 변한다. 나는 관객이 이 시점에 빛 그 자체의 변화에 집중하길 바랐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길 바랐다. 그리고 비로소 [수증기가] 일어나고, 원래의 주기로 돌아와 다시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타이밍의 변화가 좋았다. 앞선 비행기 쇼트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첫 번째 비행기는 비교적 빨리 착륙하고, 순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째 비행기는 좀 더 기다려야 했고, 나머지는 2-3분 간격으로 연달아 빠르게 착륙했다. 반복되는 과정이지만, 그 주기가 무너질 때 관객의 시간 지각이 변화한다. 이 시간의 숙고가 내겐 매력적이다. 영화는 결국, 다양한 과정 속에서 시간을 지각하고, 시간을 새기는 일이다.
SP: 당신의 영화 중 다수에서 쇼트의 길이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다. 필름의 길이 때문이든, 기차의 길이 때문이든, 담배의 길이 때문이든 말이다.
JB: 《레일로드》(RR, 2007)에서 [쇼트 길이를] 가장 편안하게 결정했다. 만들어놓고 보니 조금 더 길게 찍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기차마다 그 전후로 시간을 좀 더 줬어야 했다. 기차가 풍경에 간섭하고, 사라진 후, 풍경이 슬며시 다시 나타나서, 간섭을 뒤로하고 스스로 재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적어도 쇼트의 후반부라도 조금 더 길게 찍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촬영할 때에는 너무 길게 찍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필름 촬영이다보니 돈이 나간다고 생각해서 빨리 끊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제는 HD로 찍으니까 20분 동안 카메라를 돌리고 적절한 시점을 고를 수가 있다. 훨씬 수월해졌다.
SP: 《RR》에는 기차가 중간에 갑자기 멈추는 쇼트도 더러 있다. 다시 출발하려면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할까 봐 불안해지기도 했다.
JB: 그렇지, 그런데 내가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는 기차를 기다릴 만큼 대담하진 못하다. 기차가 종종 멈추는 건 같은 선로를 이용하는 다른 열차가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오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들이 마음에 든다. 나 역시 놀랐거든. 어떤 때는 필름이 다 떨어져 갈 때 기차가 멈춰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나는 무척 기뻤다. 왜냐하면, 달리는 중에 필름이 끊기면 미처 다 찍지 못한 게 되지만, 멈춘 뒤 끊기면 “오케이, 컷”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거나, 멈출 때까지 본다―이게 나의 룰이었다.
SP: 《RR》에는 그런 원칙에 배치되는 쇼트들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기차가 화면을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이미지 안에 있는 경우가 있다. 기차가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기에 점점 보이지 않게 되지만, 여전히 프레임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너무 멀어서] 이미지 상에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라고 말이다.
JB: 맞다. 역시 조금 더 오래 찍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했다면, 형태가 남아있기보다는 점처럼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경우도 있긴 했다.
SP: 《엘 벨리 센트로》(El Valley Centro, 1999)의 한 쇼트는 르네상스식 원근법으로 농약을 살포하는 비행기를 보여준다. 비행기는 카메라, 즉 당신 머리 위로 날아가는데, 이것은 감독과 관객이 눈앞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JB: 《엘 벨리 센트로》에 거의 모든 쇼트를 찍을 때 나는 우선 상황을 관찰하고 카메라를 설치해 녹화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밭을 갈거나 목화를 수확하거나 잡초를 매거나. 그런데 농약을 뿌리는 걸 찍으려고 했을 때는 내가 방해하는 꼴이 되었는데, 그들이 내 쪽으로는 살충제를 뿌리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하니까. 나는 아이디어를 내서, 카메라를 세워두고 차로 달려가서 숨어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비행기에서 주먹을 흔들면서 열을 냈는데, 어쨌든 내가 거기 있는 한 농약을 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방해가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한 번의 시도 후에 나는 이대로는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빌렸다. 따라서 그 쇼트는 연출된(choreographed) 것이고, 살충제 대신 물을 사용했다. 두 번 찍었다. 첫 테이크에서는 물감을 섞은 물을 썼는데, 조종사가 내 말대로 운전하지 못했다. 두 번째 테이크에서는 정확히 지시에 따라 운전했는데, 물감을 섞은 물을 다 써버린 후였다. 그래서 그냥 투명한 물을 사용했다. 밝은 황록색 물이 있었는데, 그건 무척…
SP: …회화적이었군.
JB: 그래, 무척 회화적이었지. 되게 특이한 발색용 화학 약품을 사용하곤 하는데, 풍경에 흩뿌려질 때 정말 아름답다.
SP: 당신 영화의 특출난 점은 미학과 자연, 경제, 심지어는 정치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 《루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지 미학적인 ‘상투어’에 지나지 않는 낭만주의적 뒷태(Rückenfigur)*는,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리는 무슬림들의 등으로서 정치적인 것이 된다.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시간에 따라 이미지의 미학을 변화시킨다.
* 역주 - Rückenfigur 혹은 ‘back-figure’는 전경을 응시하는 주인공의 후면을 묘사하는 구조적 장치로, 낭만주의 회화에 특히나 빈번하게 차용된 모티프이다. 낭만주의 이전까지 이 인물상은 관람자와 주인공의 동일시를 매개하는 서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주로 순수한 미적인 효과를 위해 활용되었다. 인터뷰어 Silke Panse는 여기서 단지 도구적으로 전락한 “낭만주의적” Rückenfigur를 환기하고 있다.
JB: 나는 물론 나만의 미학과 시선을 개발하고 싶다. 하지만 미학은 실제보다 덜 정치적으로 사태를 인지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지속(duration)을 통해 쇼트에 정치적인 것을 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장소를 통해 영화적 변항을 확장하므로, 관객은 지속을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눈앞의 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걸 읽어내도록 강요당한다. 즉, 일견에는 전적으로 미학적인 경험일 뿐이더라도, 시간이 지속되며 그것이 해체되고, 이미지에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단서가 드러나길 바란다. [무슬림 쇼트에서] 다들 청바지를 입고 있고, 일부는 심지어 메이커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 이건 좀 요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청바지 차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청바지는 노동자 계급의 특징이고, 무슬림은 모두 이민자이다. 즉, 이민자들은 종종 혹은 항상 노동자 계급으로 남는다. 이 쇼트는 이런 면에서 미적으로 아름다운데, 인물들은 줄곧 한몸처럼 움직이다가 말미에 가 기도의 어떤 단계에 접어들면 더이상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집단적인 종교적 개입이 개인적인 종교적 개입으로 전환한다. 여기 담긴 정치적, 사회적 함의가 마음을 끈다. 혼자 남아 기도를 올리는 이들은 자신만의 종교에 무척 감화되어 있고, 어떤 면에선 정말 헌신적이다. 나는 오히려 집단을 볼 때는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단지 그것뿐이다. 하여튼 그 쇼트는 처음에는 그렇게 [단지 미적으로] 보이지만, 끝에 가면 각기 기도 올리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정말 강렬하게,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본 적 없는 식으로 말이다. 건물을 구경하러 간 걸 제외하면 나는 사실 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 종교 없이 성장한 셈이라 약간 편향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제도화된 종교를 향한 나의 편견이 흔들린다. 거기에는 대단한 장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개입은 성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내 삶의 빈 구멍일 수도 있겠다, 뭐. 나는 그런 의식이나, 무언가에 대한 헌신을 겪은 바 없다―그런 게 그냥 잘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자란 방식이 그렇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용주의자가 되었다. 오직 수학적인 해결책만을 바랄 뿐이다.
SP: 당신의 후기작들은 대지를 응시하면서 좀 더 영적으로 변한 것 같다.
JB: 그렇다. 풍경은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지 깨닫게 해준다. 스스로의 미미함을 아는 것은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전체에 자신을 맡기고 개인의 사소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소문자 종교’라고 할 법하다.*
* 역주 - 베닝은 개인의 (영성적인) 실천에 정향한 ‘소문자 종교’(religion)와 제도화된 종교(집단)를 가리키는 ‘대문자 종교’(Religion)를 구분하고 있다. 이 용어 구분은 학술적으로 관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구분 자체는 꽤 유서 깊다. 이를테면, 쇠얀 키르케고르는 ‘종교성 A’와 ‘종교성 B’를, 에리히 프롬은 ‘인본주의적 종교’와 ‘권위주의적 종교’를, 프리드리히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과 ‘사도 바울의 규범’을 서로 엄격히 구분하였다. 대략 전자는 자율적이고 정직한 내적 명법과 도야를, 후자는 타율적이고 잔혹한 외적 질서와 순종을 표상한다.
SP: 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당신은 구조[주의] 필름메이커로 여겨지는데, 본질적인 패턴으로서의 구조는 변하지 않고 반복한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에서 구조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심지어는 영적인 것을 열어젖히는 것 같다.
JB: 응, 흥미로운 해석이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그러니까, 그것[구조]은 자유를 허용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각 참여자가 자신만의 자아를 영화에 가져올 수 있게 해주는 그릇이지. 바깥을 보는 건 즉 안을 보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편견들을 다시 평가해볼 수도 있다. 그것들은 틀리게 인지되었을 수도 있고, 또 이 새로운 경험으로 낡은 경험을 재평가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걸로 다시 현재의 경험도 달라질 수 있다. 현재와 과거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셈이다. 네가 지닌 가치를 평가해보는 것이 성장을 위한 공식이다. 가치가 경험을 평가하도록 두는 것이 아니고.
SP: 그렇다. 많은 영화들은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어를 재현할(re-create) 뿐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도. 정말로 바라보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JB: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로버트 프랭크의 《주택 개량》(Home Improvements, 1985)은 이 문제를 정직하게 다룬다. 그 사람 인용구를 적어둔 게 지금 주머니에 있는데, 어제 상영회에서 쓰려고 했었다. 《주택 개량》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늘 바깥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고, 언제나 참인 것을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참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저 밖에 있는 것만 빼고. 그리고 저 밖에 있는 건 계속해서 변한다.” 나는 내 작업에서 정확히 같은 것을 느낀다. 언제나 진실된 걸 찾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진실이란 없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 있는 것’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보이는 건 진실하지만, 보이는 건 늘 변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인용문을 마음속 깊이 믿는다. 몇 년 전 이걸 처음 봤을 때, 내면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 일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SP: 단 한 쇼트에서?
JB: 응, 응. 그 사람이 어떻게 찍었냐면, 장소는 노바스코샤였는데, 카메라를 들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바깥에 있는 것은” (그리고 패닝하면, 그의 집은 바다 위에 있고, 파도가 치고 안개가 밀려온다), “바깥에 있는 것은 참이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것은 계속해서 변한다.” 그건 글자 그대로 사실이다. 바람이 계속 바다거품을 날리고, 해는 빛나고, 모든 게 변하고 있으니까. 즉,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리’로서 풍경을 가리킨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실은 경험을 거듭할 때마다 지각을 달리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은유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SP: 자연과 구조가 어떻게 관련된다고 생각하는지?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JB: 사실, 자연은 구조에 의해 결정적으로 정의된다. ‘스파이럴 제티’가 이를 증언한다. 소금 결정들은 실제로 방파제 위에서 나선형으로 자라났다. 나선은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소라껍데기나 나무의 나이테에도 피보나치 수열이 있어서, 해체되고 반복되며 스스로 자라난다. 아름답게 정립된 체계를 지닌 거의 모든 자연은, 따라서 수학적인 구조를 갖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교조적일(dogmatic) 필요는 없다.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그저 잘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체계 속에 들어갈 때, 우리는 늘 뭔가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인간은 맞아 들어가기엔 너무나 똑똑해져 버렸다. 굳이 맞출 필요 없이, 사물을 입맛대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를 지탱하는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구는 이 체계가 무너진 후에도 존속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인 그 아름다운 구조에 맞추어 들어가는 대신 그것을 거스르고자 하기에 이런 일이 생긴다.
SP: 《에버스를 따라 북으로》(North on Evers, 1991), 《사방》(Four Corners, 1997), 그리고 《유토피아》(Utopia, 1998)에서는 생활사가 구연되지만, 이미지는 내레이션과 다른 것을 보여준다. 《사방》에서는 이미지가 이야기에 뒤쳐져서 제시되고, 《유토피아》에서는 리하르트 딘도의 영화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Ernesto Che Guevara, The Bolivian Diary, 1994)의 사운드 전체가 재생되지만, 이미지는 볼리비아 대신 데스벨리에서 멕시코 국경까지의 사막지대를 보여준다. 이 영화들은 상응하는 풍경을 내다보기보다는, 새로운 정신적 풍경과 지리학적 궤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JB: 《에버스를 따라 북으로》를 만들 때 나는 관객이 먼저 읽을 텍스트를 만들고, 그 후에 이미지가 제시되도록 했다. 일종의 텍스트-이미지 관계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관객은 텍스트를 먼저 읽고 마음 속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 후 실제 영화[이미지]와 그것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방》을 만들 때도 같은 아이디어를 이어갔다. 나는 네 개의 다른 역사적 이야기들을 썼다. 사람들은 회화를 배경으로 이를 각각 낭독했고, 낭독 이후에 그 역사를 보여주는 13개의 쇼트가 제시되었다―어떨 땐 무척 축자적으로. 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 읽힌 텍스트와 이미지의 ‘축자성’에서 어느 정도는 분리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곧이대로 묘사된 것이 아니고, 방금 전 들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직접 재구성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건 《에버스를 따라 북으로》와도 유사한 지점이다. 나는 텍스트에 맞춰 ‘축자적인 이미지’를 삽입하는 방식에 잘 동조가 안 된다. “오, 토끼가 달아났네요.”라고 한다면, 곧이어 꼭 토끼를 보여주는 식인데 말이지. 《유토피아》에서도 마찬가지의 고민이 있었다. 체 게바라의 다이어리를 차용한 리하르트딘도의 텍스트를 쓰니까, 거기 맞춰 축자적인 이미지를 잘라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축자성은 틀린 것이다. 장소가 다르니까. 그래서 나는 60년대 후반에 일어났거나 일어나려고 했었던 혁명을 서던 캘리포니아로 수입해 오기로 했다. 어울리는 장소를 골라서, 캘리포니아의 사건들을 체의 혁명 일기와 엮어 그려낸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일기의 초반, 즉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 때문이기도 했다. 체는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이 경영하는 대농장을 목격하고서 정치적으로 깨어났다고 썼다. 그들의 땅과 노동력이 이렇게 착취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극도로 반-제국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됐다.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역전된 제국주의로서, 혁명을 본래의 자리로 옮겨두었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의] 임페리얼 밸리에서는 여전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남아메리카와 멕시코에서 온 사람들이 값싼 노동력으로서 미국에 팔려간다. 이제는 방향만 바뀐 셈이다. 그래서 나도 방향을 바꿔 혁명을 이곳[서던 캘리포니아]에 가져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체가 작은 마을에 와서 철로를 건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거기 맞춰 어떤 철로 이미지를 잘라 넣을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일반적으로는 꺼리는 축자성이지만, [체가 말하는] 정확한 그 철로가 아니기 때문에 타협할만한 불일치가 존재하는 셈이다. 실제 철로를 찍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게 분명하다. 왜 볼리비아의 철로가 아니라 서던 캘리포니아의 철로를 생각해야 할까? 나는 리하르트 딘도의 사운드트랙을 훔쳐오면서, 이것으로 한동안은 텍스트-이미지 실험을 더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던 캘리포니아의 혁명에 대한 내 아이디어를 해방시켜 준 훔쳐온 텍스트―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종결점이었다. 이 이후로는 더 이상 텍스트를 사용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거의 10년 가량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다시 해볼지도 모르지만. 잘 모르겠다.
SP: 어쩌면 텍스트-이미지 영화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좇던 방식이 호수나 구름, 수증기 같은 물의 다양한 형태들을, 혹은 산업이 자연에 가한 영향을 좇는 것으로 옮겨간 것은 아닐까?
JB: 맞아. 센트럴 밸리에서의 농업으로 벌어들이는 연수입은 지난 세월 동안 캘리포니아에서 캐낸 금값의 총합보다 더 크다고 한다. 금을 찾으러 캘리포니아로 향했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이 센트럴 밸리 땅을 밟았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진짜 금광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지. 있잖나, 인공적인 경작 시스템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말이지. 물론 영원히 가진 않을 것이다. 관개 농업은 서서히 땅을 망칠 테니까.
SP: ‘캘리포니아 삼부작’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각각 어떻게 달리 그려지는지 좀 더 설명해주면 좋겠다. 자연은 각 작품에서 매번 다른 종류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는데.
JB: 삼부작은 원래 《엘 밸리 센트로》 한 작품으로 시작했다. 《유토피아》를 막 만들고 난 이후라서, 나는 저렴한 노동력을 불법으로 유용하는 이 기업형 농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연방 정부와 주 정부에서 건립한 관개 시설을 이용했다. 달리 말해, 세상에서 가장 싼 물과 아마도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우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일을 하는 자는 누구이고, 돈을 버는 자는 누구인지 하는 식으로. 난 그것이 다만 이미지를 통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오직 서른 다섯 개의 이미지만을 사용했고, 엔딩 크레딧을 통해 이미 드러난 것을 다시 적기해 두었다. 관객이 미적 감상에 골몰한 나머지, 이미지에서 이는 정치학을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스》(LOS, 2000)는 이 영화의 도시 버전인 셈인데, 시골에서 도시로 이행하는 전환점이었다. 연관성이 있다면, 로스앤젤레스가 수자원 시스템 위에 세워졌다는 점 때문일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는 오웬스 밸리에서 물을 훔쳐왔고, 모노 호를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물을 빼앗긴 농부들과 도시 간에 싸움이 있기도 했었다. 나는 서른 다섯 쇼트로는 도저히 로스앤젤레스 담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스》 촬영 당시―물론 도시풍경 영화였다―나는 이 도시에 대한 나의 감정, 즉 일종의 애증을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나는 재활용 공장이나 폐차 시설, 공공 정원 같은 운영 중인 시설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다시 풍경에서 모종의 해방감을 찾으려는 바람으로, 《소고비》(Sogobi, 2001)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아무런 인간의 흔적도 없이 시작하지만, 점차 그것이 드러난다. 끝에 이를수록, 풍경에 대한 인간 행위의 침투를 명시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세 영화를 관통해 흐르는 물이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다. 《엘 밸리 센트로》의 마지막 쇼트에서, 펌프는 물을 산너머의 관개 시설로 흘려보낸다. 《로스》의 첫 쇼트에서는 멀홀랜드*가 건설한 방수로에서 물이 흘러 로스앤젤레스로 공급된다. 이게 [멀홀랜드가 지은] 첫 번째 방수로이다. 이 방수로가 처음 개방할 때, 오천 명의 사람이 컵을 들고 모여들었다. 멀홀랜드가 “여기 있습니다, 마셔요”라고 말하자, 모두 컵을 채우곤 물을 들이켰다. 물이 있으니 캘리포니아에서 생명이 번성할 것임을 보여주는 세러머니였던 셈인데,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로스》의 마지막 쇼트는 조용한 말리부 해변이고, 《소고비》의 첫 쇼트는 빅 서어의 거친 파도로, 무척 거세게 보인다. 《소고비》의 마지막 쇼트는 《엘 밸리 센트로》의 첫 쇼트와 동일하다. 《엘 밸리 센트로》에서는 물이 아래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나오고, [《소고비》의] 마지막 쇼트에서는 물이 다 빠지고 드러난 배수관이 수면에 초현실적인 공동(空洞)을 만들어 놓는다. 물의 흐름이 세 영화를 연결하고, 영화의 끝에선 물이 낮아져 있다. 첫 번째 영화가 시작할 때 보였던 [물의] 풍부함은 더 이상 없다. 이것은 지금 물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중요해질지를 보여주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 역주 - 윌리엄 멀홀랜드는 로스앤젤레스의 수자원 공급을 책임졌던 공공 엔지니어이다. 그의 기여로 LA는 캘리포니아 최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언급된 영화들]
13 Lakes. 2004. [Film]. Dir ected by J. Benning. U.S.A./Germany: Benning, Westdeutscher Rundfunk.
Casting a Glance. 2007.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Ernesto Che Guevara. The Bolivian Diary. 1994. [Film]. Directed by Richard Dindo.
F/CH. Arte, Ciné Manufacture, La Sept Cinéma, Les Films d’Ici, Télévision Suisse-Romande (TSR).
Four Corners. 1997.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El Valley Centro. 1999.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LOS. 2000.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North on Evers. 1991.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Home Improvements. 1985. Directed by R. Frank. U.S.A.: Frank.
Landscape Suicide. 1986.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Sogobi. 2001.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
RR. 2007.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Germany: Benning, WestdeutscherRundfunk.
Ruhr. 2009. [Film]. Directed by J. Benning. Germany: ZDF/3sat, Schaf oder Scharf Film.
Ten Skies. 2004.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Germany: CalArts, Westdeutscher Rundfunk.
Utopia. 1998. [Film]. Directed by J. Benning. U.S.A.: Ben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