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dge of the World
세계의 끝 한가운데서


세르주 다네 1983

일환 옮김

무엇도 잃지 않았다. 언론의 타성적인 구조, 그리고 칸에 선판매된 영화들과 정전(正典)이 되어버린 영화들에 대한 식상한 회고 밖에서, 여전히 몇몇 운석이 떨어진다. 일 년에 한 편, 그리 나쁘지는 않다. 1982년은 파라자노프의 <석류의 빛깔>이었다면, 1983년은 눈부신 놀라움으로 <아나>의 해가 될 수 있다. 안토니우 헤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우의 이 두 번째 장편 영화는 분류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우리의 지각에 의해 관통된 세계로의 여정, 꿈의 정확함과 깨어있음의 부정확함 사이, 현재의 현기증을 통해 통과해 나아가는 이 장엄한 여정이란. 우리를 환희 속에서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라며 읊조리게끔 만드는 영화가 이제는 충분히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에 대한 공포보다는, 깨어날 때 자신이 어디서 온 것인지, 어떤 쇼트-침대(lit)에 있었는지, 어떤 세계로 깨어나고 있는지, 이를 모르는 이의 감정을 되찾기 위해. 방향감각을 잃은 순간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태고의 감정으로,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이 태고의 표현을 내뱉을 수 있다는 기쁨. 작고 과대평가된 이름 “나”보다 앞서 있는 동사 “있다”를 위해, 그 깨어남을 위해.

<아나>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감독들이 포르투갈인이므로 포르투갈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나라는 여전히 너무 넓다. 포르투갈 북부, 미란다 두 도루 지역, 헤이스와 코르데이우는 이미 몇 년 전 이곳에서 또다른 환상적이고 분류불가한 작품, <트라스-우스-몽트스>를 촬영했다. 여기, 다른 그 어떠한 곳에서도 없는 곳. 바로 여기, 그 어떠한 곳도 될 수 있는 곳. <아나>의 힘은 바로 이것에 있다. 이 힘은 모든 게으른 분류를 일찍이 좌절시킨다. 영화란 개별의 예술인 동시에 보편의 예술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미지들은 어딘가에 닻을 내렸을 때 이토록 더 잘 떠다닌다는 사실, 한 영화가 이사실들을 분명히 상기시켜준 것은 제법 오랜만이다. <아나>-픽션? <아나>-다큐멘터리? 이런 분류는 너무 조잡하다. 다큐멘터리적 픽션? 그것도 아니다. 픽션이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계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도록 세계의 끝까지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속에는 마치 화석 속 곤충처럼 픽션이 자리하고, 픽션 속에도 다큐멘터리는 존재하는데, (본질적으로) 카메라는 어디서든 그 앞에 놓인 것을 담아낼 뿐이기 때문이다. <아나>-세계의 끝? <아나>-세계의 한가운데? 이 영화 속에 이상한 장면이 있다. 아나가 살고 있는 집에서 그녀의 아들이 흡사 가족에게 시험 강의를 해보는 방학 중 대학 강사처럼 끝없이 말을 해댄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내뱉는다. 그의 모국(포르투갈의 이 지역)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기묘한 일치들, 가령 두 어부 문화, 그리고 물 위를 이동하는 두 방식의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뭐예요?” 한 아이가 묻는다.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옆이야.” 영화감독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음 쇼트야.” 일전 <트라스-우스-몽트스>에서 같은 질문이 (또 다른 아이에 의해) 던져졌다: “독일은 어디야?” 그 아이가 이주 노동자인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저기”라고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저기’란 바로 옆, 강의 다음 굽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세계의 끝이자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 아이에게 그러했다. 그리고 <아나>에서, 아픈 아이가 침대 위에서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쇼트 위로, (화면 밖에서) 헤이스가 낭독하는 릴케의 시**가 들려온다. 이것은 그저 교태(coquetterie)가 아니다. 이것은 감응하고, 포용하고, 융합하는 운율이 세계의 기저에 자리한다는 한 시인의 아이디어다. (헤이스는 시를 썼고, 이들은*** 출간되었다.)그리고 이런 영화는 그 운율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여전히 (지방적이지는 않되) 지역적인 동시에, (에스페란토****는 아니되) 보편적이다. 그것이 바로 <아나>가 방향감각을 잃게 만드는(désorienter) 까닭이다. 유프라테스 강이 도루 강을 물들일 때 우리는 정말로 [동향으로의] 방향감(l’orient)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시인에 의한 영화, 또한 지질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가능한 모든 “학자”의 영화이다. 헤이스와 코르데이우는 포르투갈인이지만 리스본 출신은 아니다. (그곳은 너무 지방적인 수도다.) 포르투 조차도 아니다. 그들은 관광객들이 결코 닿지 못하는 포르투갈 북부에 그들의 영화가 자리하게끔 한다. (관광객들은 바보처럼 알가르브에 떼 지어 몰려온다.) 아름답고 방치된 풍경들, 호화로운 유적처럼 인식되어야 할 풍경들, 마치 도시인 것처럼 촬영된 시골. <아나>에서는 나무, 도로, 집의 돌들이 대부분은 이름을 갖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이 교차점이며 익명인 것은 없다. 이 영화는 평온한 소란이다. 바람 소리는 이미지들을 부풀게 채우고는 이어 비워낸다. 마치 바다처럼. 이 감각들 한가운데에 공허함이 있다. 마치 이 포르투갈 북부 지역에 공허함이 자리하는 것처럼. 헤이스와 코르데이우의 영화들은 기이한 현실을 담아낸다. 집단이동(l'exode)*****이 있었고, 그 다음 이민(l'émigration)이 있었다. 남성들은 떠났다.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놀이 안에 남겨져 있다. 노인들은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남겨졌다. 부모의 감독은 부재하고, 조부모의 보호만이 남아있다. 순간적이고도 부드러운, 놀랍고도 진지한 시선의 교류 속에서.

그렇다면 이야기는? 당신이 원한다면 있다. 하지만 원할 필요는 없다. 아나는 어느 노파의 이름이며, 그녀는 조형처럼 곧게 서서 집 안에 머문다. 그녀의 얼굴은 주름지지만 자랑스럽고, 그녀의 몸은 무겁지만 고귀하다. 아나는 한 명의 할머니 그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상징에는 이르지 않는다. 확실히 대지나 뿌리, 농부의 잡동사니 같은 상징은 아니다. 아나도 여성이며 병약해진다. 아니, 외려 약해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담비 털로 장식된 망토를 입고는, 무르나우 영화의 인물처럼 숨죽인 고매함을 두르고 시골을 가로질러 걷는 놀라운 순간이 있다. 함께 들려오는 바흐의 마니피캇(Magnificat)은 아름다움의 차원에서, 이러한 [그녀의] 출현과 대등한 층위에 있는 것이다. 노파는 뒷모습을 드러낸 채 이름 하나를 외친다: “미란다!” 이내 피가 그녀의 입에서 뿜어나고, 그녀는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미란다는 인근의 작은 마을 이름이자, 길 잃은 어느 소의 이름이다. 그 소는 다음 쇼트에서 다시 등장한다. 단 하나의 단어에도 늘 이에 관한 무수한 반응이 존재한다. 시골에서 홀로 부르짖다 죽음에 이르는 위태로움, 시는, 언제나 그런 것이거늘.



역주
* 실제로 <트라스-우스-몽트스>에는 다네가 서술하는 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의 음성으로 “독일… 스페인…”이라는 대사가 들려온 후, 쇼트가 전환되어 굽이도는 강과 둘러 쌓은 암벽면을 보여주는 구성이 있는데, 해당 지점을 두고 다네가 글을 전개한 것으로 예상된다.
** 『두이노의 비가』 중, “제3비가 DIE DRITTE ELEGIE”를 낭독한다.
*** 헤이스의 출간된 시집으로는 “일상의 시” poemas quotidianos 가 있다.
**** 에스페란토(Esperanto): 루드윅 자멘호프(Ludwik Zamenhof)에 의해 1887년 창안된 인공어로, 국제적 의사소통을 목표로 한 중립어로서 고안되었다.
***** 집단이동-exodus, 이민-emigration은 국제이주기구(IOM)의 『이주용어사전 제 2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