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저 멀리서
세르주 다네 1977
일환 옮김
안토니우 헤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우가 1976년 트라스-우스-몽트스 지방(영화의 제목이 여기서 비롯됨)에서 제작한 이 영화의 주제는 ‘멀어짐(éloignement)’이다. 멀리 있다는 상태(망명) 그리고 멀어지는 행위(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어 망각되기)라는 이중적 의미. 멀어짐, 헤이스와 코르데이우가 천천히 말해주듯, 멀어짐은 바로 이 포르투갈 북동부의 역사다. 트라스-우스-몽트스를 지배하는 수도(리스본)의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 – 이해 받지 못한 통치. 수도에서 공포된 법률은 이곳 농민들에게 이르지 못하고, 농민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헤이스가 카프카의 『만리장성 축조 때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의 한 구절을 방언으로 번역하는 영화의 핵심 장면, 그 [카프카적] 문제가 1976년 현실 속에서 비극적으로 재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멀어짐은 지방을 탈문화화(dé-culture)하고, 켈트족과 이교적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며, 지역 문화의 조각들을 일련의 엽서처럼 민속화(folklorise)한다. 농민들이 경작된 들판과 목초지로부터 멀어지는 과정. 먼저 지역 광산으로 (팽이를 가진 아이, 아르만두가 비에 젖은 폐광을 찾는 아름다운 장면), 그 다음 아메리카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왔다가 곧바로 다시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유럽, 프랑스, 독일의 공장과 조립 라인으로.
헤이스와 코르데이우가 관심 갖는 멀어짐{혹은 그 반대 개념인 가까워짐(rapprochement)}은 현재의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발생한다. 이 영화는 파묻혀 있던 것을 먼지 털 듯 꺼내거나, 지나간 시간을 한탄하거나, 누구에게도 보물이 아닌 것을 전시하는 (‘세계의 모든 지식 Connaissance du Monde’ 같은 네크로필리아 관객한테만 유의미한) 그런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훨씬 더 엄격한 작업이다: 쇼트 안에서 (그곳은 꿈과 불안의 영역임을 재차 상기하고자 한다)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들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작업. 그렇게 함으로써 “한 지역의 영화적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조금씩 구축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헤이스와 코르데이우는 특히 트라스-우스-몽트스의 (지리적 지도나 리스본 관료 체제에서의) ‘공식적 존재성(existence officielle)’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 반대에서 출발한다: 각 쇼트의 파내짐(creusement), 찢어짐(déchirement)에서, 마치 일전 언급된 강이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제 물길을 파고 따라 포르투갈에 흐르는 것처럼.
멀어짐은 단지 주제만이 아니라(이것을 두고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고, 박식한 척하며 어설픈 비평을 쓸 수도 있겠지만), <트라스-우스-몽트스>의 질료(matière)이기도 하다. 각 쇼트의 은밀한 발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외화면에는 정도가 있는가? 더 바깥(독일)과 덜 바깥(스페인)이 있는가? 다시 말해, 화면 밖으로 유실된 것들(그것이 보여주고 내보낸 것)의 상태, 그것의 ‘존재의 질(qualité d’être)’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내릴 수 있는 답은 이렇다. 영화적 쾌감 전체가 이에 달려 있기도 한데, 외부에는 정도가 없다. 멀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문 너머 바로 옆이든 어디든 간에, 영화 안에서는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현대 영화에서의 안과 밖의 변증법은 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공식 하나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불확정성을 위해 하나 덧붙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되돌아온다면, 그 자가 여전히 본인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바쟁이 꿈꿨던 “현실의 이음매 없는 옷(robe sans couture du reel)”은 항상 프레임에 의해, 몽타주에 의해, 선택하는 모든 것에 의해 재단된다. 역쇼트가 이를 꿰매어 수선(재봉)한다 하더라도, 그곳에는 근본적인 공포, 불안이 자리한다: 쇼트A에서 보여지고 쇼트B에서 사라진 것이 쇼트C에서 다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변장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외화면을 경유한 모든 것은 다른 것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다. 랑이나 투르뇌르(오늘날의 승계자인 자코나 비에트*)처럼 내러티브적이고 주류적인 감독들조차도, 이 다른 것, 영화 안에 존재하는 그 의심, 이것이 가능하고 이것으로 공포나 코미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었다. (참조. 부뉴엘은 이것을 영화 창작의 첫 동기로 삼았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내가 헤이스의 영화를 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증거로, 기차가 밤을 뚫고 지나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거론하자.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기차를 항상 명료히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재발견(포르트-다 fort/da**)한다. 때로는 연기의 형태로(눈앞에 보이고), 때로는 휘파람 소리로(귀에 들려온다).
헤이스에게 있어 시간적 멀어짐과 공간적 멀어짐은 다르지 않다. 근래의 기억과 장기 기억 사이에도 차이가 없다. 거기에 없는 모든 것은 선험적으로(a priori) 동일하게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것이 중요한데, 동일하게 [영화로서] 생산되어야 한다. 이는 선형적이며 연속적인 상실(시각 혹은 기억의 상실) 개념과 단절하고, 역동적이고 이질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을 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production)이란 두 가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품을 (노동으로) 생산하는 것, 또 하나는 (필요시) 증거물(pièce à conviction)을 생산하는 것이다. 영화cinéma = 전시exhibition + 노동travail. 자신들의 박식함에도 불구하고 헤이스와 코르데이우는 마치 자신들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처럼 행동하며, 이를 무지한 관객에게 전하려 한다. 헤이스가 인터뷰에서 말한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결국에는, 관객의 지식이나 지식을 가장한 명제(supposé-savoir)에서 출발하는 작업보다, 혹은 (좌파 픽션에서 더욱 파괴적인) 공통된 도그마, 나태한 민족감으로부터 파생되는 작업보다, 더 낫다고 생각된다. 카메라의 어느 쪽에 있든 미조구치의 격언을 실천하는 쪽이 더 낫다. 매 쇼트마다 눈을 씻어내는 것이다.
*역주) 브누아 자코(Benoît Jacquot), 장-클로드 비에트(Jean-Claude Biette)를 말함.
**역주) 프로이트의 저서 『쾌락 원리의 저편』에서 생후 18개월의 에른스트가 했던 놀이, 실이 감긴 나무 실패를 커튼 너머로 던졌다가 당겨 가져오는 것을 칭한다. 현존과 부재의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