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스-우스-몽트스, 안토니우 헤이스 인터뷰

인터뷰어: 세르주 다네, 장-피에르 우다르
인터뷰이: 안토니우 헤이스
1977년 5월

일환 옮김
카이에 뒤 시네마, no. 276 pp. 337-41
카이에: 트라스-우스-몽트스의 농민들과 함께 작업했던 촬영 현장과 그 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헤이스: 저희는 촬영에 참여하는 농민, 아이, 노인들이 우선 카메라와 친해지지 않고서는 절대 카메라를 그들에게 겨누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희에게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촬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기계들과의 문제도 생기지 않았죠. 저희가 그들과의 촬영을 시작했을 때, 카메라는 이미 그들에게 하나의 작은 애완동물이나 장난감, 혹은 부엌 도구처럼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집에서 사용 중인 조명을 활용하거나, 들판에 반사판을 설치해 간접 조명을 활용하는 것까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촬영이 일종의 놀이처럼 여겨졌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희가 특정한 사항을 강조해서 촬영해야만 할 때도, 대체로 부드러운 방식으로 요청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도 이를 충분히 이해해줬습니다.
매우 주요한 점은, 그들이 영화 작업을 통해 저희 역시 영화의 농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하루 16시간, 때로는 18시간 일했습니다. 그들은 저희가 일하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들에게 계속 촬영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가축을 굶기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지라도 저희의 요청을 강요라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경이로웠습니다.
제가 사람들에 관한 고리타분한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북동부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인간관계 방식이 있다고 믿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칠지라도 지역민들은 반갑게 저희를 맞으며 문을 열어주고, 빵과 와인을 비롯해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눠줍니다. 그러하면서도 그들이 마냥 상냥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굉장히 강인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은 부드러움과 거침 사이를 급변하며 오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카이에: 그들과 영화, 텔레비전의 관계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헤이스: 저희가 촬영했던 마을에는 영화관도, 텔레비전도 없었습니다. (종이 식탁보 위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한다.) 포르투갈이 이렇게 있고, 스페인이 이렇게 있죠. 북동부는 이쪽이죠. 여기 브라간사라는 도시가 있고, 저쪽에는 미란다 두 도루라는 도시가 있어요. 저희가 촬영한 모든 마을은 국경 근처, 이 두 도시 주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은 브라간사에 가면 영화관과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죠. 많은 마을의 경우가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영화의 관계는 여전히 사진과의 관계와 유사했습니다.

카이에: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하고 구상했을 때, 어떻게 해야 이 농민들을 민족지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했나요?

헤이스: 저는 민족지학적인 시선이 일종의 악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지학은 언제나 후행할뿐인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희는 북동부 사람들을 회화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희는 이 지역이 제시하는 인류학적 문제에는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켈트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죠. 마르칼레(Markale)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글도 전부 읽었는데, 이 지역에는 여전히 켈트 문화가 남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이베리아 건축도 연구했는데, 일대의 가옥 구조는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죠. 다만 이러한 연구들은 언제나 선택과 강화를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저희가 어느 풍경을 오로지 아름다움의 관점에서만 읽어낸다면, 그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아름다움의 관점과 함께 경제적 관점 그리고 지정학적 관점에서 풍경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곧 풍경의 현실이 됩니다. 변형되지 않은 그대로의 땅, 경작된 땅도 포괄해서 말이죠.
따라서 북동부 지역에 대해 저희가 알고 있던 모든 것, 사람들로부터 배운 모든 것, 그리고 저희 스스로 발견한 모든 것을 변증법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발견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죠. 마르가리다는 북동부에서도 가장 거친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그곳의 와인 맛, 어린 시절의 전설과 악몽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깊이 있는 영화적 소재가 되었습니다.

카이에: 그렇다면 리스본에 사는 사람들에게 북동부는 어떤 곳인가요?

헤이스: 아주 먼 곳이죠. 리스본에서 보면, 북동부는 전기, 아몬드, 질 좋은 소시지와 햄, 철 같은 것들이 나오는 곳이에요. 북동부의 농민들이 리스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리스본 사람들이 북동부를 이야기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리스본에 사는 북동부 출신의 이주민들에게는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리스본에서 2-30년을 살았어도, 고향 방언으로 나무 이름 하나만 들어도 여전히 마음이 동하고는 하죠.

카이에: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 중 하나는 가톨릭 교회, 즉 종교가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저희가 알고 있는 4월 25일 (포르투갈 혁명) 이후의 포르투갈에서, 특히 북부 지역을 생각한다면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 같은데요…

헤이스: 이 논제에 관해서 마르가리다와 저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원칙을 따랐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그 어떠한 제도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은 그 지역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한 종교입니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그곳에서는 훨씬 더 오래된 종교적 전통이 존재하죠.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매우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드루이드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도, 시적 표현도 아닙니다. 그들이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나무를 사랑하는 태도를 보면, 그 속에는 기독교와 완전 무관한 훨씬 더 유구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것의 부재를 통해 그것을 현존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하나의 프레스코 벽화, 북동부 지역의 서사시로, 인공적인 세계관 속에서 작은 예배당과 마을 신부를 등장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영화의 경우, 아마 저희가 만든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카이에: 하지만 최근 북부 포르투갈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않나요? 교회는 농민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무엇을 이용했을까요?

헤이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신부들은 농민들과 일종의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은 죽음과 사후 세계를 이용해 농민들을 조종하고 두려움을 심어주죠. 그리고 현재 농민들이 특정한 주물숭배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교묘히 활용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하지만 그들이 사제와 말하고 어울리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농민들과 직접 교류하며 느낀 것은 그들의 저항, 철학 그리고 일상 속에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고대적인 종교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카이에: 영화의 도입부에서 한 아이, 즉 목동이 바위 새겨진 글귀를 발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글은 아주 먼 과거를 가리키는 듯한데, 이러한 요소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연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헤이스:  영화에는 세 명의 목동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셋은 각각 다르죠. 당신이 말하는 첫 번째 목동은 자연의 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마치 아프리카 풀라족 목동이나 중동의 목동처럼, 목자라는 직업과 양 떼에 대한 고유한 규율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밤을 거닐며, 여전히 신석기 시대에 속해 있는 듯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가 양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일종의 암호 같은 것으로, 음악적 요소, 음성적 요소, 어휘적 요소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충돌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하위방언은 포르투갈어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이죠. 그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목동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 원시적인 인간입니다.

카이에:  영화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오르게 되었나요?

헤이스: 앞서 말했듯, 마르가리다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저는 포르투에서 6km 떨어진, 힘도 부족하고 아름다움도 부족하고 표현력도 부족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이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존재했습니다.
처음 건축가 친구와 함께 트라스-우스-몽트스에 도착했을 때, 마치 제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 지역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되었고, 마르가리다와 함께 작업하며 그곳을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모든 요소가 영화적인 감각 상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촬영을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로케이션 헌팅이 진행되어 있는 상태였죠. 그렇다고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촬영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동적인 계획이었죠.
예를 들어, 영화 속 많은 장면에서 무엇이 연출된 것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미학적 접근 방식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은 저희에게 힘겨운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하나의 ‘종합’(synthesis)이 아니라 ‘대립물의 대면’(confrontation of contraries)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즉흥적으로 촬영하는 과정에서도 저희는 모든 속도와 모든 놀라움이 필요했지만, 그러면서도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게 대중적인, 기생하는 것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위해 저희는 곤충의 눈을 필요로 했죠.

카이에:  저는 영화의 첫 번째 부분(아이들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픽션을 활용해서 점점 더 본질적인 정보를 드러내고, 결국 다큐멘터리에서 기대하는 것과 더 가까운 사실에 도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헤이스:  그런데 어머니가 브랑카 플로르(Blanchefleur)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것이 픽션일까요 혹은 다큐멘터리일까요? 사실 둘 다입니다. 마을에서는 어떤 사건이 픽션일 수도 있습니다. 마을에서 저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은 황금빛 먼지, 샘가의 동물들 같은 요소입니다. 하지만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다시 강으로, 또 문을 통과해 이동하다 보면, 풍경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더 이상 단순히 픽션과 다큐멘터리로 구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집에서는, 이를테면, 한 어머니가 브랑카 플로르 이야기에 대해 구술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 중세 시대의 아이들은 이미지 속 브랑크 플로르 같은 존재죠. 이 포르투갈 마을에서 저희가 깨닫는 것은, 고대 문화, 그 이후의 문명, 그리고 오늘날의 일상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하나의 악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구분을 거부하는 태도 속에서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그곳의 사람들은 도시에 빚지지 않은 삶의 형태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패배할 뿐인 존재가 아니죠. 유럽으로 떠났던 자식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돌아온 자식들은 이웃 집 옆에 자기만의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죠. 그러면 부모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이 미쳐버렸구나!” 이렇게 부모와 자식 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가치를 알고 있으며,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문화적 제노사이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어떠한 순간에 도래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리스본으로 넘어가는 모든 식량 공급을 끊어버릴 테다!” 이것은 단순히 반동적인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손과 머리가 가치 있는 존재로 남기를 원할 뿐입니다.
말씀해주신 사항으로 돌아가죠. 사실, 제 영화에는 전환점이 존재합니다. 그 전환점은 서정성이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강에서 노는 장면에서마저, 그들은 얼어붙은 송어를 통해 죽음을 발견하죠. 영화 속 먼지 쌓인 커다란 집, 죽음들, 팽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훗날 광산으로 가는 아이), 이 모든 것은 상시 위협받는 세계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피날레"는 부메랑처럼 작용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견디기 위해 첫 부분의 서정적인 공간과 시간으로 보상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장장이가 마을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할 때, 그들은 명백히 식민 전쟁으로 다친 아이들 그리고 죽음들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곧 유럽으로, 리스본으로, 빈민가로, 공장으로 흘러가겠죠. 이것이 저희가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유입니다. 직접 방문해보면 볼 수 있죠, 그곳의 아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고, 거기에 자연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은 여전히 일종의 천사와 같습니다.

카이에:  아이들이 또한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른들은 일종의 후경에 머물러 있고, 화면에 등장하기보다는 보이스오버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죠.

헤이스:  왜냐하면 그곳에 어른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는 – 약간 거칠고 억눌린 듯한 목소리의 – 보이스오버는 영화 속에서 잠깐 출현하는 인물의 음성입니다. 그는 광부의 아들이자, 이제는 어떠한 조직에서 일하는 중산층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에서 50년을 일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트라우마를 동반하죠. 그는 이전에 농민들이었던 옛 광부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영화에서 마을 공동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은 전해져야 합니다. 저희는 춤을 추며, 공동체적으로 암흑 속을 걷습니다.
보이스오버는 광부들의 삶을 반영하는 일종의 대위법적 요소입니다. 마치 기차의 경적 소리가 영화 속 한순간 들려오는 페르골레시의 음악과 대위법을 이루는 것처럼요. 언제나 교차, 즉 소리와 이미지의 변증법이 있는데, 이것은 연결이나 생략, 그리고 영화 교본에 나오는 여타 규칙들보다 저에게 훨씬 더 흥미로운 것입니다.

카이에:  영화의 한 장면에서 카프카의 텍스트를 인용했습니다. 사람들이 수도로부터, 따라서 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은 법을 추측해내려 하지만 법은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기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트라스-우스-몽트스가 리스본과 맺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축약된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요?

헤이스:  네, 저희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지역 방언으로 번역했고, 그 결과 텍스트는 구강적이며[육체적이며] 풍부한 표현력을 얻었고, 놀라운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귀족들이 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훌륭한 단어를 갖고 있습니다: baratím. 공동체의 법칙들은 유연하기 때문에 역사적 변화에 의해 변형됩니다. 이것들은 물론 구전 법칙이며, 한 번에 일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유연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유연성 때문에 그 법칙들은 성문법에 의하여 소멸되었죠. 어느 날은 한 목자가 모든 양을 방목하러 이끌고, 다른 날은 또 다른 목자가 그렇게 합니다. 이 지역에는 원시적인 공산주의가 존재합니다. 때로는 그들이 도시인들보다 더 미래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가령, 리스본에서 24시간 동안 물이 부족하면 집단적인 신경증이 발현합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그토록 거친 삶 속에서 눈, 불, 열기를 어떻게 견뎌낼까요? 어떤 인내심으로. 심지어 일부 농민들이 PIDE[포르투갈의 비밀경찰 조직으로, Estado Novo(새로운 국가) 독재 시기에 활동]에 투옥되었을 때도, 그들은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제가 포르투에서 알고 지낸 많은 친구들이 많은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정작 투옥되었을 때는… 농민들이 더 용감하고 다른 이들이 더 비겁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바이슈 알렌테주(Baixo Alentejo)의 농민들이 체포되었을 때,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갖지 못한 인내심을 갖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카이에:  당신의 영화는 조작을 거부하는 이미지-소리 단위들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헤이스:  저희는 명백한 동시녹음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마치 교향곡 같은 소리가 가능하도록 단위들을 조직했습니다. 이 단위들은 때때로 영화 후반부에서 메아리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노파가 넘어진 아이에게 말합니다. “울지 마, 내가 갈랑둥(Galandun)을 불러줄게.” 직후, “춤추는 자들이 일어나네, 일어나네…”라며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남자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까운 거리에서는 흐릿하게, 그리고 멀리서는 마치 엽서 속 풍경처럼 보이죠. 저희는 관객들이 “와, 엽서 같네!”라고 생각할 수 있게끔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실제로 그 장소에서 춤을 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은 저희가 오늘날 상상해낸 이미지일 뿐이죠. 그러나 주요한 것은, 그 장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우리는 노파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장면과 만나게 됩니다. 그녀가 춤추는 자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연속적 환멸(disillusions)이지만 함정은 아닙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해 너무 리듬이 느리다고 말합니다. 특정한 것을 말하기 위하여 영화의 끝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있어 다양한 단위들이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희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저희가 흑백으로만 편집할 수 있었고 나중에 색보정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컬러 영화를 흑백으로 편집 테이블 위에서 12개월 동안이나 작업하다니!

카이에:  영화는 누구에게 상영되었나요? 어떤 반응을 얻었나요?

헤이스: 가장 먼저 저희는 촬영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영화를 시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영화를 좋아했고, “함축적 의미”를 포함해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몇 가지 부정적 비판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리스본이나 포르투에서 볼 수 있는 부류의 반동주의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죠. 그들은 기독교 종교의 부재, 댐을 보여주지 않은 것, 전통 요리, 가난 등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를 불태우고 네거티브 필름을 파괴하고 싶어했죠. 그러나 그러한 반응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고, 주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었죠.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농민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카이에:  하지만 이 영화가 정확히 어떻게, 그렇게 영화와 단절되어 있는 농민들을 돕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요?

헤이스:  물론, 영화적 언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이 언어를 갖고 있지 않죠. 하지만 그들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은 중세 연극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영화적인 공간, 집이나 자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영화를 학습한다면 영화 감독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 농민이 어느 날 저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저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저기 몇 킬로미터까지 이어지는 그 빛을 한 번도 보지 않고 리스본으로 떠난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저는 리스본에서 벽돌이나 거리 위에 드리운 빛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영화를 보았을 때,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이나 자유로운 표현들이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을지라도, 그들이 좋아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것[감각]들을 인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눈 장면입니다. 그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눈, 눈의 아름다움, 눈의 눈부심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흙이나 짚을 먹는 사람이 있듯, 저는 그들이 눈을 먹게 만들었죠.

카이에:  포르투갈 영화에 대해 보다 전반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포르투갈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4월 25일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요? 마지막으로, 현재 무엇이 잘 작동하고 무엇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헤이스:  이 주제에 대한 제 입장은 세이샤스 산토스(Seixas Santos)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저희는 “포르투갈 영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파시즘 점령기든 4월 25일 이후든 간에, 세계 영화와의 단절,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 부족, 그리고 실질적이고 충분한 경험의 부족으로 특정지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포르투갈의 전반적인 문제와도 유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질’은 존재하지만 ‘질의 양’ 자체가 부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포르투갈 영화를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1962년 세대조차도, 그들의 노력이 매우 주요했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몹시 개인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했는데, 그것은 특정한 참정의 이름이었고 낭만주의의 이름은 아니었죠. 저는 4월 25일 이후로도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협동조합과 독립 영화감독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국가의 지원금으로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저희는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는 영화를 만들고, 그리고 더 이상 다른 영화를 만들 돈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저희는 이렇게 항상 걱정하며 일하죠, 유감입니다.

카이에:  다른 영화 감독들은 당신의 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헤이스:  이 주제에 관해, 마르가리다와 저는 약간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어떠한 영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희를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와 비교하고 싶어할 때조차도, 저희는 그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갖고 있지만 이를 강력히 거부합니다. 설령 그가 작업하는 방식, 그의 기준을 두고 말하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저희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방향은 올리베이라의 방향과 수직적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형이상학적인 경향, 우리에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예수회주의의 잔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에:  인상적인 것은 올리베이라와 당신,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북쪽, 포르투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리스본 출신이 아니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리스본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반면에 위대한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데요…

헤이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스본에서의 삶은 영화 감독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더 깊이 탐구할 시간을 많이 남겨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도 제 친구들이기에 너무 가혹한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이 그들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우리가 왜 영화에 종사하고 있는지에 관한 본질적인 이유들을 알고 있을 만큼 충분히 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가 생과 사의 문제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