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코스타가 기억하는 헤이스-코르데이우  
2025년 2월

인터뷰이: 페드루 코스타
인터뷰어: 에드워드 맥케리

일환 옮김
본 인터뷰에서 페드루 코스타는 그의 스승이자 영웅인 안토니우 헤이스와 마르가리다코르데이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 인터뷰는 2025년 2월 22일과 23일, 뉴욕 Metropgraph에서 진행된 The Theater of the Matters 주관의 회고전, <영화의 농민: 안토니우 헤이스 & 마르가리다 코르데이우>(Peasants of the Cinema: António Reis & Margarida Cordeiro)를 위해 진행 및 공개되었다.

인터뷰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로트링겐 지면에 기재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해주신 물질의 극장(The Theater of the Matters)의 에드워드 맥케리(Edward McCarry)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Sincere thanks to Edward McCarry of The Theater of the Matters for kindly allowing the Korean translation of the interview to be featured in the Lothringen.
안토니우 헤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우의 첫 장편영화 <트라스-우스-몽트스>(1976)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포르투갈 북부의 외딴 지역평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차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포르투나 리스본으로 향하는 이 땅의 남녀를 실어 나르고, 고향에는 노인과 아이들, 유령과 신화만이 남겨진다. 황혼의 시간, 카메라는 먼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적정] 노출을 위한 광량이 충분치 않다. 우리가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저물어가는 태양빛 속에서 포착된, 멀어져가는 연기 기둥뿐이다. 이 쇼트가 지속되면서, 이 구상적인 사건은 더욱 추상적이 된다. 그것은땅속 깊이 파고들면서도, 땅에 매이지 않고 요동친다. 우리 눈 앞에서 그것은 기억이 되고 꿈이 된다.

이것은 헤이스와 코르데이우가 촬영하기 훨씬 전부터 수년간, 셀 수 없이 많은 밤에 걸쳐 관찰해온 것이었다. 그러고는 1974년 어느 저녁, 그들은 북부 지역을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여행하던 중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이것을 촬영했다. 이러한 격렬한 변증법이 헤이스와 코르데이우의 영화를 풍요롭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이다: 기나긴 시간과 야성적인 속도,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규모들, 사실과 환상, 철저함과 직관, 이러한 혼재 모두가 영화의 각 쇼트에 영향을 끼친다. 이 기차의 이미지는 페드루 코스타에게 영속적으로 각인되었는데, 그는 70년대 후반 리스본의 국립 영화학교에서 학생이던 시절 처음으로 <트라스-우스-몽트스>를 보았다. 헤이스는 코스타의 형성기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헤이스가 파트너 코르데이우와 함께 만든 작품은 젊은 영화감독이던 코스타에게 “수많은 문과 창문을 열어주었다”. 이 대화에서, 코스타는 “삶의 매순간을 사랑하며 살았던” 헤이스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술회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가 여전히 헤이스-코르데이우의 작업방식, “별이나 행성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그들의 용기, 그것을 부활시키기를 꿈꾸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멕케리: 당신은 리스본 영화학교에서 헤이스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유형의 선생이었나요?

코스타: 글쎄요, [일반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선생으로서의 모습이 따로 있기 마련이죠.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안토니우의 경우는 경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적 모습과 사적 모습이 다른 경우의 선생들도 있지만, 안토니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죠. 그는 항상 일관되었습니다. 제가 영화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당시 그는 <자이무>(1974)와 <트라스-우스-몽트스>를 만들었고, <아나>(1982)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포르투갈 영화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었죠. 영화와는 점진적으로, 천천히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역사 전공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역사 강사가 될 미래가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와 친구는 영화학교 지원 광고를 보았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각 면접을 보고 합격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학교는 197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협력적인 선생/학생 관계, 그것은 여전히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약간의 권한을 가졌고, 선생들 자신도 그 혁명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매우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죠.

저는 우연히 안토니우와 가까운 곳에 살았는데, 학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리스본의 한 동네였습니다. 수업에서 2-3시간 대화한 후, 우리는 학교를 나와 동네 거리를 걸었고, 그는 자신이 말하던 것을 계속 이어나갔죠. 우리는 자주 공원에 가거나,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매우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죠.

혹시 건네 듣거나 그의 사진 서너 장에서 이미 보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매우 작은 사람이었고, 매우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 팽팽함과 견고함의 의미에서 말이죠. 그는 어딘가 저에게 이기 팝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웃음] 그는 항상 긴장되어 있었고, 몸을 약간 흔들며 걸었습니다. 마치 춤추듯 말이죠. 제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정확히 똑같은 옷차림이었습니다. 작은 모자, 가죽 재킷, 갈색 바지. 그는 농부와 록밴드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전 저의 학업 환경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유형의 선생이었죠.

안토니우는 말이 많았어요. 말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고다르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는 늘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즉, 삶이 그를 위대한 연설가,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시켜 왔달까요. 그는 방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 미술사, 영화는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문학과 역사, 어떤 시대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었죠… 그리고 이것이 제가 리스본 영화계에 들어오게 된 경로입니다. 그는 제가 영화학교를 떠나지 않은 이유였죠. 두 세명 정도 다른 사람들도 더 있었지만, 안토니우는 특별했습니다. 이후 파울루 호샤도 만났지만, 안토니우는 달랐습니다. 그후 친구들과 저는 영화관에서 <트라스-우스-몽트스>를 보게 되었고, 저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스승으로서 그의 아우라는 엄청나게 거대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확신으로 바뀌었죠. 지금까지도 그것은 저에게 주요한 단서를 준 첫 포르투갈 영화로 남아있습니다. 그 전에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어떻게 개인적인 것들을 촬영해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트라스-우스-몽트스>는 모든 면에서 무수한 문과 창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학교 밖에서의 친구가 되었는데, 제가 학교를 관두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영화 현장에서 보조 스태프로 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죠. 동시에, 저는 첫 장편을 준비하며 제작비를 마련하려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토니우와 게속 연락하며 지냈죠. 저는 그와 마르가리다의 집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겹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영화 감독인 주앙 보텔류였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의 절친한 친구였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함께 어울렸습니다. 주앙의 두 번째 영화는 리스본에서 <동경 이야기>(1953)를 리메이크한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식 이별 - Um Adeus Português, 1985]. 그것은 훌륭한 영화이지만 지금은 약간 잊혀졌죠. 저는 그 영화에서 조연출을 맡았고, 안토니우는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도 그 영화에 출연하는데, 신부 역할을 맡았습니다. [웃음] 안토니우는 농부 역할을 맡아, 갈퀴나 뭐 그런 것을 들고 있었죠.

제가 첫 영화를 포르투갈 영화 기금에 출품했을 때, 우연히도 안토니우는 선정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죠. 결과적으로, 네 명이 반대했고 오직 한 명만이 찬성했습니다. 그 한 명이 안토니우였죠. 저는 그 후 안토니우와 함께 가졌던 매우 서글픈 커피 타임을 기억합니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 그가 말했습니다. 그는 거의 울고 있었죠.

멕케리: 그리고 그는 결국 당신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죠, 맞나요?

코스타: 네, 제가 영화를 완성했을 시기가 정확히 그가 세상을 떠날 때였습니다. 제가 최종 믹싱이나 그런 마무리 단계에 있을 때였죠. 매우 이상한, 신비로운 죽음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죠… 제가 말씀드렸듯, 그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저주였을지도 모르겠지만 – 늘 일종의 변화된 상태에 있었죠. 그는 시인이었어요. 정말 시인이었죠. 랭보 같은, 아니면 약간… 미친 것은 아니고, 엄밀하게는 아니죠. 그는 언제나 그… 상태에 있었어요.

멕케리: 불안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코스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항상 경이로워하는 상태, 사랑에 빠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영속적인 사랑의 상태였죠. 영화를 촬영할 때는 이런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저는 항상 말합니다. 그 순간만큼은요. 물론 7-8주 동안 꾸며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상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에 빠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의 매순간을 사랑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은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멕케리: 영화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헤이스는 박식했고, 코르데이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방대한 지식과 연구를 영화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촬영의 순간에서는, 그가 직관에 의지하고, 새로운 무언가가 예기치 않게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랑에 홀린 사람 – 눈앞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의 – 모습입니다. 그 모든 철저함이 갑자기 직관과 맞닥뜨립니다.

코스타: 맞습니다. 그는 정말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는 그림을 보았고; 영화를 보았고; 읽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와 함께했습니다. 마르가리다도 마찬가지였죠. 저는 그들의 촬영을 직접 도와준 적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제 막 조연출 일을 시작한 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토니우와 함께 촬영하는 것이 꿈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트라스-우스-몽트스>의 촬영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계절에 걸쳐 촬영된 고된 영화였지만 – 그들은 끊임없는 창조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저는 모든 것을 사전 계획하고 일정을 짜야하는 전문적인 조연출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와 함께라면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죠. 안토니우, 마르가리다와 함께하는 촬영에서는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아나>에서 일식을 촬영했던 일화도 유명하고, <트라스-우스-몽트스>의 마지막 기차 장면도 그렇습니다. 그 기차 장면은 처음부터 염두해두고 있던 것이었지만, 그런 것은 글로 적어둘 수도, 미리 상상할 수도, 계획해둘 수도 없는 것이죠.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안토니우와마르가리다는 담요를 두르고 영화를 만들기 몇 달, 어쩌면 몇 년 전부터 평원을 가로지르는 연기 기둥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번, 하루 만에 그것을 촬영했죠.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들이 수백만 번 동안 봐온 것이었죠.

저는 여전히 이런 방식의 제작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불가능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여전히 실행될 수 있습니다: 공통적이고 굳건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영화를 만드는 것, 이런 것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식을 기다릴 용기, 별이나 행성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까지 기다릴 용기를…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는 당시에 그것을 더 밀어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절대적인 과대망상, 환상, 추상이라는 비난이 수반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구상적이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다고 말해왔습니다.

멕케리: 그것이 그들 영화 속 모순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영화는 매우 특정한 장소, 사람들, 시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의 피상만을 담아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죠. 대신 그들은… 시적 현실(Poetic Reality)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이르려고 노력합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것이죠. 이 작업은 엄청난 노력이 동반된 “조작”(falsification)이나 “환상”(fantasy)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자이무>에 대한 인터뷰에서 헤이스는 정신 요양원의 환자들을 마치 전문 배우처럼 엄격하게 지도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더 인간적이면서도 더 조각상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어떤 것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더 영원하고 더 실재적으로 만드는 것이죠. 우리는 당신의 영화에서도 이러한 작업 방식을 발견합니다.

코스타: 맞습니다, 진지한 영화 감독 누구에게나 있어 작업 [방식] 자체에 무언가가 존재하죠. 그들은 모든 영화를 노동처럼 접근했습니다. 안토니우는 그가 북부지방의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어의 추가: <트라스-우스-몽트스>는 브라간사와 미란다 두 도루의 외딴 북부 마을들에서 마을 주민들을 배우이자 협력자로 삼아 촬영되었다.]] 영화도 곧 노동이라는 것.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유희도, 서커스 같은 것도 아니라는 것. 그들은 함께 작업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제안을 철저하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유일의 방법은 그것이 진정한 노동임을 직접 증명해 보이는 것뿐이었죠.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고통을 견뎌야 할 정도로, 영화가 감자를 수확하는 것만큼이나 고된 노동 행위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제 말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수업에 참여하자 곧장 창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학교에는 전부 서너 개의 16mm 프린트가 있었습니다: <파업>(1925), <스트롬볼리>(1950), <미치광이 피에로>(1965), 그리고 다른 어떤 것. 우리는 영화를 여러 번 보고 글을 써갔고, 안토니우가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멕케리: <미치광이 피에로>를 언급하신 게 흥미롭네요. <아나>의 사운드 녹음을 담당한 조아킹 핀투는 앙투안 본판티와 함께 사운드 믹싱을 했는데, 본판티는 <미치광이 피에로>를 비롯한 많은 누벨바그 영화의 사운드를 담당했습니다. <아나>는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있어 고다르와 흡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헤이스-코르데이우는 영화계의 외부인이었지만, 그들은 자크 리베트그리고 스트로브-위예 부부 같은 다른 감독들과 부분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당신이] 스트로브-위예 부부와 그들의 영화에 대해 나눈 대화를 기억하시나요?

코스타: 저는 그들이 두세 번 정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헤이스-코르데이우의어떤 영화들을 봤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트라스-우스-몽트스>는 확실합니다. <아나>도 아마 봤을 것 같습니다. 스트로브-위예는 안토니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리베트와 짧게 서신 교환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단지 몇 장의 엽서였는데, 한 장에서 리베트는 그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를 보면, 제 존경을 전해주세요.” 안토니우는 자신들의 영화(특히 <트라스-우스-몽트스>)에 대한 리베트의 사랑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는 장 루슈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가까웠습니다. 루슈는 그들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고, 그들 또한 루슈를 인정했죠. 동시대 영화 감독들 중에서는 루슈,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리베트가 헤이스-코르데이우를 가장 많이 존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뒤라스는 수업에 많이 왔었죠… 하지만 루슈에 대한 안토니우의 존경은 엄청났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매우 따뜻하고 동지애 같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루슈는 감수성과 기질의 측면에서 안토니우와매우 가까웠죠. 루슈가 민족지학자로서 만들어낸 작업은 안토니우가 행한 현장 작업, 즉 구전 전통, 음악, 시를 수집하는 행위와 매우 밀접했습니다.

멕케리: 그렇죠. 제 생각에는 그래서 파울루 호샤가 <움직이는 삶>(1966)의 대사 작업을 할 때 헤이스와 협업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헤이스는 영화 속 어부들과 함께 지냈고, 그들의 언어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코스타: 정확합니다. 그는 북부 출신이었어요. 혼자서도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안토니우가 당나귀를 타고 있는 멋진 사진들도 있죠.

멕케리: 정말 놀라운 사진들이죠. 헤이스가 이런 분야의 연구를 했던 건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였나요? 그러한 현장 조사의 원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코스타: 영화 작업에 착수하기 훨씬 전부터였습니다. 물론, 제가 아는 바에 따르자면 그는 포르투 시네클럽(Cineclube do Porto)에서 초기 영화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멕케리: 맞습니다, 우리는 그가 시네클럽에서 만든 <플로리페스의 연극>(1962)을 상영할 계획입니다. 민속 연극의 부분을 기록한 공동제작 영화였죠. 제가 알기로는 마노엘드 올리베이라가 이 영화를 보고 <봄의 제전>(1963)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거의 리메이크 작품인 셈이죠. 헤이스는 <봄의 제전>에서 조연출로 일했지만 그 영화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가 텍스트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코스타: 맞습니다. 올리베이라가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처음에는 그가 몇 가지 의견을 내는 수준이었지만, 이후 예행연습이나 무대 위에 올리는 방식 대한 문제로 이것이 이어졌습니다. 올리베이라는 헤이스를 향한 엄청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 문제들로 인해 둘의 견해 차이는 더 커져버렸습니다. 안토니우가 더 내성적이었죠. 그들 간에는 이론적인, 실질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는 영화의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왔지만 아주 미약한 부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계보가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이 작은 영역, 아마 장 루슈도 자리했던 이 영역을 정확히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루슈는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보다 영화의 괴물들과 대적하는 데 있어 더 잘 준비되어 있었죠: 돈, 프로덕션, 난항들, 진정한 난항들, 그리고 비평까지요. 제 말은, 안토니우에게 있어 어떤 것을 듣고, 어떤 것을 읽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연대 부족이 그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도 저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다른 무언가를 원했지만, 불행히도 완전히 무너졌죠. 저는 그가 눈물을 참는 모습을 사석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그는 감성적이었어요. 주앙 세자르 몬테이루가 말하던 것처럼, 그는 늘 극도로 감정적인(à flor da pele) 상태였죠. 언제나 무게,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죠. 약간은 스트로브와 위예처럼 말이죠. 그 두사람은 세계의 문제들에 열려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죠. 그렇게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제 생각에 그가 선생이 된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사랑받았거든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영화를 위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모든 면에서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어요.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죠. 그리고 그가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분명했어요. 한편으로, 그는 기관, 권력자, 비평가, 재정 지원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고통받았습니다. 그것이 영화 제작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자 치부이기도 하죠. 정말 이상하죠, 그는 분명 매우 강인한 농부, 참나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제가 남자에게서는 한 번도 본 바 없는 유약함도 갖고 있었습니다.

멕케리: 헤이스가 당시 청춘들에게 미쳤던 영향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고대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아방가르드한 영화들을 만들었죠-너무 고대적이기 때문에 아방가르드한 영화들이요. 이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들이 여전히 청춘의 영화라는 것입니다. 모든 에너지가 그 안에 있죠. 이 영화들은 오랫동안 보기 어려웠고, 그들에 얽힌 전설 같은 것도 생겼죠-그건 당신 덕이 크구요. 이 영화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코스타: 그는 학교에서 항상 “쇼트는 너에게 생사의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젊음, 우리의 기질과 완전히 조응했습니다. 우리는 도발하고 질문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의 원칙은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일들은 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토론했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눴으며, 그 속에서 그는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와의 교류 중에서 기억나기로는, – 그는 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전달했는데 - 그 분노, 그 맹목성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실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론 약간은 맹목적이었지만,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죠.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너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분노는 필요한 것이며, 아마도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이쪽 일에서는 그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그는 매우 외향적이고, 큰 미소를 지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아서 영화를 만든 사람은 우리 중에 다섯 정도일 거예요. 앞서 말했듯, 저는 주앙 보텔루의 조연출이었고 이후에는 몬테이루와 함께 일했으며, 그리고는, 글쎄요, 저는 제가 흥미를 느끼는 일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막 떠난 후였고, 카페의 테라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몬테이루 영화에 나오는 공원이었죠.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의 집도 그 정원 뒤편에 있었습니다. 안토니우는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고, 이후 마르가리다가 남아서 살았죠. 꽤 나중에서야 그녀는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멕케리: 지금은 꽤 외딴 곳에 사시죠?

코스타: 아마, 그녀가 태어난 곳일 거예요.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시죠. 아무튼, 그날 저는 공원에서, 아마 영화 사이에 있거나 뭐 그랬을 텐데, 안토니우가 와서 앉더니 어떤 프로젝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너가 나를 도와야 해, 너는 이제 조연출이니까, 어떻게 하는지 잘 알잖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품이나 특수효과 같은 많은 것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저는 대본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메모로 된 그것을 읽기 시작했죠.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흑백의 SF 프로젝트였습니다. 외계에서 온 존재들 – 그러니까 괴생명체나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등장했죠. 특수 효과가 정말 많이 필요했어요. [웃음] 오늘날 저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흥미로워 보였죠. 하지만 후에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제 기억에 따르자면 <12월>이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확신은 못합니다… 그 프로젝트는 그들이 동시에 준비하고 있던 더 유명한 프로젝트, 즉 멕시코에서 찍으려던 영화와 병행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우가 죽은 후, 마르가리다 혼자서 하고 싶어 했던 영화였죠. 그것은 <페드로 파라모>였습니다. 아마 아실 거예요.

멕케리: 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마르가리다가 오랫동안 그걸 혼자 해보려 했잖아요.

코스타: 맞습니다. 안토니우가 죽은 후 마르가리다가 제작비를 조달 받으려 했지만 빈번히 거절당했고, 그것은 안토니우의 분노와 좌절을 많은 부분 재확인시켜줬습니다.그녀도 고통받았죠. 그리고 그녀는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절대 잊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이것은 안토니우에게도늘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나는 내 자신을 너에게 완전히 내맡긴다. 그러니 너는 그 어떤 것도 배신해서는 안된다. 나도, 영화도, 시도.” 이것은 그에게도 늘 뚜렸했습니다. 배신에 관한 것이 아닌 산만함에 관한 것이었죠. 그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산만해지면 나쁜 것들이 덮쳐온다고 생각했죠. 한 눈을 팔면 안된다고. 자신의 프로젝트, 꿈, 팀, 동료를 절대 배신해서는 안된다고요. 하지만, 마르가리다가 많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멕케리: 후안 룰포의 소설, 『페드로 파라모』를 읽다 보면, 그들이 만들었을 법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육체 없는 목소리들과 함께하는 영화 말이죠.

코스타: 그것은 거의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를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였죠.

멕케리: 정말로 그렇죠.

코스타: 하지만 다른 하나, 리스본 배경의 흑백 SF 프로젝트는 그들 자신의 텍스트, 온전히 그들의 창작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시적인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방향을 바꿔 <페드로 파라모>의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진진했죠. 그들은 준비를 위해 멕시코에 갈 채비를 거의 마쳤었습니다. 로케이션 헌팅 말이죠. 그곳에는 물론 에이젠시테인의 유령*도 존재했습니다. 안토니우에게는 매우 깊이 자리한 유령이었습니다. 저에게도, 영원히 그렇죠.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연구를 위해 그들이 수집해온 자료 콜라주로 구성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들이 제작비만 마련할 수 있었다면, <페드로 파라모>는 확실하게도 그들의 다음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주 - 에이젠시테인은 1930년 초반, 멕시코의 역사, 문화, 혁명 후 사회적 변화를 탐구하는 옴니버스 영화, <멕시코 만세>(¡Qué Viva México!)를 제작하려 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감독은 본 영화를 통해 멕시코 혁명의 이상주의와 민속적 요소를 강조하여 그 사회 실상을 묘사하려 했다.

멕케리: 그들이 멕시코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놀랍습니다. 안토니우는거의 포르투갈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는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예술가였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들의 영화에는 카프카, 중국 시, 릴케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먼 곳의 텍스트들과 영향을 끌어들여 영화를 만들어냈죠. 그렇지만 그들이 심지어 리스본에서, 도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코스타: 하지만 그들은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스트로브-위예 부부처럼요. 그들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멕케리: 저는 시인으로서의 안토니우 헤이스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저는 그의 시 몇 편을 영어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헤이스와 파울루 호샤가 함께 하이쿠 번역집을 작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디선가 헤이스는 짧은 책만 신뢰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방대한 서적은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이쿠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이쿠는 매우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서 서사시보다 더 많은 것을 응축해낼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코스타: 맞습니다. 그 정도로(당신이 말한 정도로) 교조적이지는 않았지만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죠. 그는 동양 예술, 일본 예술, 중국 예술을 사랑했어요. 그가 페르시안산 카펫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박식했습니다: 다양한 분파, 제조업체, 시대, 스타일 등을 알고 있었죠. 그가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영화 감독 중 한 명은 미조구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아마 호샤의 영향을 받았을 텐데, 왜냐하면 파울루는 수년간 일본에 있었고 일본어를 할 줄 알았거든요. 그들은 일본 영화를 향한 애정을 공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한 것들도 놀랍지 않습니다. 핵심은 ‘축소’(reduction)라는 간단한 아이디어입니다. 쇼트가 시선을 응집해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항상 물질적인 프로덕션의 제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고, 모든 것이 실행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스트로브와 헤이스는 모두 이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방정식 양쪽 모두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습니다: 매우 구상적이고 물질적으로 되는 것, 그것이 신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역주 - 마크 페란슨이 페드루 코스타와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코스타는 유물론과 신비에 대한 흥미로운 일례를 제시한 바 있다. “언젠가 그(스트로브)가 독일에서 영화과정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모세와 아론>(1975)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강의 도중 서너 번쯤 신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어요. 그러다 몇몇 학생들이 미소 짓고 있는 걸, 거의 웃다시피 하고 있단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말했답니다. “자네들은 왜 웃고 있는 건가? 신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웃는 자들은, 결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야.” 저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선, 처음엔 신비주의이어야 한다고… 혹은 결국 그래야 한다고.”(2010년 전주국제영화제 총서 중 일부를 옮김)

멕케리: <트라스-우스-몽트스> 마지막, 기차에서 나오는 연기 기둥처럼 말이죠. 그것은 구상적인 이미지이면서도 명백히 신비롭습니다.

코스타: 그리고 그것을 하이쿠의 극한으로 간결한 형식이나 서예와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한 획으로 세상을 그리는 붓. 그것이 이들의 이상이었죠. 그리고 그것은 영화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라는 것은 돈, 사람, 촬영팀을 한 장소로 모으기 위해 겪어야 하는 온갖 추잡함을 동반합니다. 그런 다음, 공허함, 무(無)를 촬영하게 됩니다. 차량, 식사, 복장, 돈,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부재(absence)를 촬영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헤이스, 스트로브, 미조구치가 한 것이었죠.

헤이스의 경우, 기차와 함께, 그런 방식으로 현실이 뒤섞이는 것, 시간과 공간의 혼란, 그것은 일본 회화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가 우타마로 같은 일본 화가들을 수업에서 다뤘던 것이 기억납니다. 스트로브도 그것을 연구했죠. 스트로브와 함께했던 어느 오후가 떠오릅니다… 정말 놀라웠죠. 그는 일본 회화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제 기억으로는 우타마로의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집에 복제품이 있었죠. 그는 그 그림에 대해서 거의 20분 동안, 작은 위스키 하나를 들고는 계속 이야기했죠. 그는 그 그림을 영화의 어떤 쇼트와 연관지었고, 흰색과 검정색, 그리고 그 사이 회색들로 우타마로가 표현할 수 있었던 모든 안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영화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죠. 빌어먹을 필름, 카메라, 렌즈 같은 것들 때문에요. 스트로브와 헤이스는 이런 감정을 공유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성가신 것이었죠. 그들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카메라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술이나 연극처럼 말이죠. 기계는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멕케리: 장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메라는 그에게 완전히 성가신 존재였죠. 그리고 이 모든 기술의 “진보”도 마찬가지였죠.

코스타: 맞습니다. 그것이 스트로브와 헤이스 같은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바로 카메라입니다. 멍청하고, 차가운 물체죠. 그리고 그것에 딸려오는 모든 것들: 기계, 정치, 경제도 문제였죠. 안토니우는 이 세상에 잘 맞춰져 있는 사람은 아니었죠. [웃음]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때때로 안토니우와 마르가리다가 이 시점에서 만들고 있을 영화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궁금합니다… 당신이 말했듯, 그는 한쪽 어깨에 아방가르드를, 다른 쪽에는 페르시아, 일본, 벨라스케스 등을 갖고 있었죠. 오늘날의 모든 어려움들, 제작비도 부족하고 협업자도 구하기 힘든 이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이런 여건이라면, 저는 안토니우가 아주 작은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아시다시피, 비디오나 디지털로 말이죠. 거의 혼자서요.

멕케리: 그가 <반다의 방>(2000)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코스타: 그렇죠, 분명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멕케리: 제 생각에는, 그가 아마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의 해답이라면 그것일 테니까요.

코스타: 네, 확실하죠. 그는 정면 돌파(take the bull by the horns)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어. 환상에 빠지지 말자.” 이러면서요. 혹은 어쩌면 아마도 <페드로 파라모>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멕케리: 그럴 수도요.

코스타: 아니, 아니, 아마 그건 아니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