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브-위예가 페터 네슬러에게

일환 옮김
From Straub-Huillet to Peter Nestler
1 뉴 저먼 시네마와의 만남 1966
2 페터 네슬러, 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스트 1966
3 페터 네슬러 소개 1968-1972
4 다니엘 위예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69
5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84

본 지면에서 페터 네스틀러(Peter Nestler)는 합의된 표기에 따라 페터 네슬러로 옮겼다.
1 뉴 저먼 시네마와의 만남 1966

새로운 영화의 특징이 (상류)사회 그리고 그것의 반대진영으로 자기규정하는 영화 산업 양자 모두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화들은 적확하게도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때 혁신적이었으나 이제는 길들여져 버린 (그리고 단순한 아이디어와 미학적-도덕적 클리셰만을 담아내는), 그리고 망가진 독일 영화 산업과 그 산업에 의존적인 언론들이 한동안 찬양해오며 수단을 총동원해 대중에게 강요하고 있는, 누벨바그와 대조적이다.

<화해불가>(1965), <우주의 영점>(1966), <로마에서의 아침식사>(1965), 그리고 {<수문에서>(1962)를 제외한} 페터 네슬러의 모든 영화들은 배급사를 갖고 있지 않다. <수문에서>, <마쇼르카-머프>(1963), <댐>(1964), <화해>(1965)는 그들의 배급사에 의해 보이콧 당해왔다… <마쇼르카-머프>, <댐>, <로마에서의 아침식사>는 18세 미만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휴일과 국경일에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이 영화들은 특별 수상의 기회는 물론 최소한의 세금 감면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심지어 <작은 전선>(1965)을 포함한 이러한 영화 중 그 어떠한 작품도 베를린, 오버하우젠, 만하임 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정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적이 일절 없었다.

모두 스타일과 작문을 갖추는 것에 만족하고 어떤 식으로든 유행하는 포르노그래피(풍자, 패러디, 엔트로피)를 거부한다: 예술은 브레송이 말하는 “경이로운 시네마토그래프”에만 경의를 표하며, 그것의 위대함은 프루스트의 말처럼 “[참된 예술의 위대성이란], 우리가 멀리 떨어져 사는 그 실재, 곧 우리가 대용하고 있는 판에 박은 지식이 농도와 불침투성을 한층 더해 감에 따라서, 우리가 더욱더 멀어져 가는 그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영화 중 어떠한 작품도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의도는 갖지 않으며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스트라빈스키는 말한다, “음악은 어떠한 것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의 창작자들은 대중만큼이나 개별적인 진실을 믿는다. 왜냐하면 브레히트가 말하듯, “당연시되는 것들의 잔해 아래에서 진실을 파내고,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연결하며, 거대한 과정 속에서 특수한 것을 붙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리얼리스트들의 예술이다.” 그리고 아라공이 말하듯, “다수로부터 정의가 태어나고, 진실이 솟아오르며, 이 안에서 미래가 형성된다. 이 정의, 이 진실, 이 미래가 예술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속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은 분리할 수 없는 총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1966, 장-마리 스트로브

원전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아드리아노 아프라(Adriano Aprà)에 따르면, 이 글은 1966년 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린 제 2회 페사로 국제 뉴 시네마 영화제(Mostra internazionale del Nuovo Cinema di Pesaro, 일명 페사로 국제영화제)의 카탈로그에 최초로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영화제에서는 스트로브-위예와 아드리아노 아프라가 기획한 뉴 저먼 시네마 섹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해 <마쇼르카-머프>는 페사로 영화제에서 두 개의 수상 실적을 기록했다.



2 페터 네슬러, 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감독 1966

페터 네슬러는 지금까지 일곱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일부는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것이고 일부는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평단에서는 이제 서서히 그의 작품을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서서히”일까, 그의 영화는 피상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분명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태도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에는 제약이 있다. 감독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유리하게 드러낼 기회도, 본인 고유의 흔적을 세계에 새겨둘 기회도,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할 기회도 없다. 오직 주요한 것은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에 대한 겸손한 태도뿐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만 다큐멘터리 감독의 성향이 드러난다.

페터 네슬러는 선험적인 주제의식 없이 자신의 영화 작업에 접근한다. 현실은 의도에 따라서 조작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완벽하게 분명한 것이 되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의 영화들이 무엇인지 보다 쉽게 설명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어째서일까? 명백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은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카메라를 집들을 향해, 길 위를 향해,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겨눌 뿐이다. 그러고는 개개인의 사람들이 말하게끔 하고, 논평 없이 선택들을 이어낸다. 그렇게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산업화된 도시, 변해가는 풍경, 노동자 운동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우리 눈앞에서 세계는 일관성을 갖게 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된다. 우리는 세계를 새로운 일관성으로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페터 네슬러는 결코 카메라 뒤에 숨어 관찰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절대 매정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더욱 날카롭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되는데, 그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대상은 현실에서 가장 연약하고 등한시되어온 지점, 바로 현실의 비밀을 드러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을 용인하지 않기에 그의 쇼트가 그저 체념하는 것처럼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그 고발은 [창작자에 의해] 정형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의 파토스를 창출한다. 따라서 네슬러 영화들의 매우 강렬한 아름다움과 시적 성격은, 현실에 빛이 드리울 때만 이목을 끄는 정형화된 시적 이미지들의 아름다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네슬러의 영화들 또한 세상이 변화하기를 요구한다. 그의 영화로는 <수문에서>(1962), <에세이>(1963), <뮐하임(루르)>(1964), <라인강>(1966), <외덴발트슈테텐>(1966), <셰필드 노동자 클럽>(1965), <그리스에서>(1966)가 있다.

이 글은 본래 이탈리아어로 "Un documentarista non riconciliato"(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스트)라는 제목 하에 Gli Irrequieti: il cinema europeo tra coscienza della crisi e impotenza della rivolta (불안한 이들: 위기의식을 지닌 유럽 영화와 반란의 무력감) 제1호(1966-67년, 밀라노: Quaderni del C.U.C.Mi.)의 80페이지에 처음 기재되었다.
3 페터 네슬러 소개 1968-1872

페터 네슬러가 전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이곳에서 직접 촬영할 수 있었던 연로한 감독들, 가령 프리츠 랑이나 로셀리니(Fear, 1954)를 제외하고 말이다. 네슬러는 아마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촬영할 것을 촬영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려 애쓰지 않은 이였기에 더욱 주요하다. 이것은 그의 불운이기도 했다. 내가 한 번 힌츠(Theo Hinz)에게 콘스탄틴 전시 카탈로그 속 뉴 저먼 시네마 부문에 네슬러의 이름이 빠져있다고 말하자 그는 “우리는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원한다”고 답했었다. 단순히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촬영하고, 그려내고, 스케치하는 이들, – 마치 사과를 그저 그렸을 뿐인 세잔처럼, 사람들은 세잔이 그린 것이 사과가 아니라 말했지만 – 즉, 사전에 임의의 형식을 부과하여 현실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화계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 까닭은 영화가 점점 더 스스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 혹은 되면 안되는 것이 되게끔 자연히 용인되어버린 것, 즉 상품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판매한다는 개념과는 별개의 문제인데, 영화가 점점 상품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영화가 종속되어 있는 구조를 폭파시킬 필요가 제시된다.

네슬러는 가장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다. 시작은 <수문에서>(1962)였고, 이는 <마쇼르카-머프>(1963)보다도 이전이었으며, 내가 뉴 저먼 시네마의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라 여기는 토메(Rudolf Thome)의 아름다운 영화, <화해>(1965)보다도 먼저였다. <수문에서>가 만하임 심사위원회의 검토를 받을 때, 사람들은 “수문이 말을 하다니, 그럴 수는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에세이>(1963)가 완성되었을 때 그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말할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이후 <뮐하임(루르)>(1964)의 경우는페르버(Helmut Färber)가 필름크리티크(Filmkritik)에 적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내게 <뮐하임>은 가장 미조구치적인 영화다. 당시 네슬러가 미조구치를 전혀 보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다. 미조구치적-의 예로는 <산쇼다유>(1954)가 있다. <산쇼다유>는 가장 강렬한 영화 중 하나이자, 유일한 맑스적인 영화이며, 당시에 사람들이 적었던 것처럼 신의 자비에 대한 영화이자 그 반대의 영화이기도 하다. <뮐하임>은 아이들이 자라나기도 전에 사회로부터 처벌받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 후 네슬러는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 외덴발트슈테텐>(1966), <셰필드 노동자 클럽>(1965), 이들은 텔레비전 방영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그리스에서>(1966)인데, 미학적인 테러리즘을 감행하는 파격적인 영화로, 종래에 이르러 나에게 더 중요히 와닿는 영화다. 당시의 사람들은 네슬러가 정치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그런 정치적 강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해당 영화에서) 군중의 구호를 동시 녹음하지 않은 것은 분명 영특한 판단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미심장할 것인데, 나는 동시녹음에 강박이 있는 일종의 동시녹음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네슬러의 비범한 철학에 따라, 정치적 구호들은 오직 그의 나래이션으로만 말해졌다. 그는 군중들이 말하고 외친 문구들을 반복해서 따라 읊조렸다. 현재 네슬러는 스웨덴 방송국을 위한 장편 영화, <루르 지역에서>(1967-68)를 제작 중이다. 브레히트의 말이 이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당연시되는 것들의 잔해 아래에서 진실을 파내고,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연결하며, 거대한 과정 속에서 특수한 것을 붙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리얼리스트들의 예술이다.”

네슬러는 내 친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는 세 편을 영화를 만든 상태였고, 그것들은 전후 독일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독일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최신작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유일한 독일 영화감독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동시대 독일 영화 전체를 네슬러의 영화와 견주어 본다면, 분명 브레히트가 1920년대 독일 연극에 대해 적었던 말을 반복할 수 있으리라. “당신들은 이것이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말해주겠다. 이것은 순전히 스캔들이다.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은 당신들의 완전한 파산의 증거다. 이것은 당신네들의 어리석음, 정신적 나태함, 그리고 퇴폐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1968년 10월 Filmkritik 142호(688-694쪽)에서 헬무트 페르버(Helmut Färber)가 진행한 인터뷰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와의 대화(Gespräch mit Danièle Huillet und Jean-Marie Straub)"의 미제목 코다(coda)로 독일어판이 처음 기재되었다.
이후 1972년 9월 Filmcritica 227호(290-291쪽)에서 "네슬러 소개(Introduzione a Nestler)"라는 제목과 마지막 단락이 추가되었고, 다니엘 위예가 이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 [역주] 네슬러가 <그리스에서>를 제작한 65-66년으로부터 약 1년 후, 중도 및 좌파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 자명해지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을 필두로 한 극우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총선을 무기한 연기하고 군부독재를 시작했다. <그리스에서>는 파시즘 정권 출현에 대한 전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공개 당시만 하더라도 반공주의가 지배적이던 서독 사회에서는 용인된 수 없는, 지나치게 공산주의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리스에서> 이후로 네슬러는 더 이상 서독에서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1968년,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SVT(스웨덴 공영방송국)를 위해 영화를 제작하거나, 부인인 쇼카 네슬러(ZsókaNestler)와 함께 자체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4 다니엘 위예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69년 3월 8일

(팔라스트 호텔 만하이머 호프에서 보냄)

친애하는 페터,

편지와 필름 프린트, 정말 고마워.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어. 이유는:
a) 바흐 영화의 영어판 사운드 편집 – 런던에서 2주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우리가 원하던 버전에 도달했어. 이제 문제는 그들이 이 버전을 그대로 상영할 것인지, 여전히 자막 버전을 선호할 것인지야!!!! 게다가 시간도 없고 35mm 플랫베드 편집기도 없어!
b) 린더도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데,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해. 우리가 3월 26일에 로마로 떠나야 할지도 몰라서, 어떻게든 보여주려고 해.

헝가리어 오디오 파일도 고마워… 헝가리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버전으로 보길 바랄 뿐이야. 쎄메스(Szemes)의 글은 들라에(Delahaye)에게 전달할게. 그런데 일주일 전에 들라에한테 헝가리에서 온 엽서를 받았어??? 들라에가 미클로시 얀초(Jancsó)의 최신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고 하더라???
졸탄(Zoltán)에게 행운을, 사진도 고맙고, 조카(Zsóka)와 유디트(Judith)에게도 많은 우정을 전해줘 …

연대기[*<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는 <신랑, 여배우, 그리고 포주>과 함께 다음 주에 테아티너(Theatiner)에서 개봉해. 어제와 오늘, 아벤틴 스튜디오(Aventin Studio)의 사운드 엔지니어와 8시간씩 작업했어.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운드를 들을 수 있도록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어 (= 사운드 후작업)... 믿기지 않는 일이야.

그 외에는 이곳이 다시 조용해졌어. 그런데 영화에 관해서는… 어쩌면 모든 게 다 헛된 일인지도 모르겠어... 적어도 지금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여. 콘스탄틴(Constantin) 사람들이 하는 짓은 “나치 시절 UFA가 하던 것만큼 나쁘거나, 어쩌면 더 나쁘다. 한 민족을 바보로 만들고, 독으로 오염시키는 일이다.”라고 J.-M.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어 – 하지만 콘스탄틴이 스스로 몰락할 때까지는 이 싸움도 절망적이야 – 그리고 그 이후에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어. 오히려 (?)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

이탈리아에서 혁명이 가능할까? (그것만이 이 바보 같은 상황과 멍청함을 한 번에 뒤흔들 방법일 텐데?) 아니면 거기의 절망도, 비록 다른 형태지만, 마찬가지로 너무도 큰 걸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뿐이야 – 하지만 그것조차도 너무 바보 같은 일이야. 영화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게. 세상에는 우리가 싸워야 할 훨씬 더 중요한 것들(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야. 그런데도 영화 때문에 싸워야 해. “pour ne pas céder [굴복하지 않기 위해]”. 고다르는 혼자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뿐일지도 몰라…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아주 슬프다는 건 아니야. 다만 피곤하고, 바흐 영화가 너무 늦게 개봉한 것(그의 조국에서조차 14개월이나 지나서!)에 조금 화가 나 있어. 그리고 우리를 15년 동안 방치하고 내팽개쳤던 같은 자들이 이제 와서 – 다른 사람이 전해주거나 글을 써주길 종용하는 방식으로 – “스트로브의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니 화가 나는 거지! 위선자들! 그래서 우리가 떠나는 거야.

토메(Thome)는 장편 영화 <탐정>(Die Detektive)를 만들었어... 근데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렘케(Lemke)는 프랑크푸르트 방화범들에 관한 TV 영화를 찍고 있어 (“그들은 세상이 너무 좁아졌다고 느낀 사람들이었다” …? 라고 렘케가 말하더군). 질만(Zihlmann)은 마치 살아 있는 시체 같아 보이고.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영화가 엄청 많아. 베를린 영화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 예를 들면 [귄터 페터] 스트라셰크(Straschek) 같은 이들은 학생들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 학생들에 의해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 카우핑거 거리(Kaufinger Straße)에는 (지하철 공사로 대규모 재개발 중인데) 나무 판에 커다란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더라: “STREIK”[파업].

로마에서 J.-M.은 오톤(Othon)을 촬영할 거야 –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의 희비극(17세기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야. 오톤은 네로의 후계자인 갈바(Galba)의 뒤를 잇는 인물이야. 그리고 두 명의 소녀, 플로틴(Plautine)과 카미유(Camille)에 대한 이야기지 (“눈은 언제나 감겨져 있길 원하지 않는다”). 16mm, 컬러, 동시 녹음. 10명의 촬영팀.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에서, 다섯 막 전체를 야외에서 촬영할 예정이야. 9월~10월?? (허가 문제와 관광객들 때문에!). ???

이 정도면 소식이 꽤 많은 편이지?
천 번의 인사를 보낼게, 그리고 온 가족에게도.
곧 만나길 바라며???



5 다니엘 위예 & 장마리 스트로브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84년 9월 10일

(JMS – 자필로 작성)

친애하는 페터,
마요르카에서 보낸 편지 고마워. (아니, 조르주 상드의 그 글은 몰랐어.) 내가 편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종종 너희 부부를 생각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리고 네 작업에 대한 경이로움과 함께.
우리는 아직 건강해 – 지금까지는 – 어느 정도는. 하지만 내 이빨과 허리는 엉망이야! 그리고 지치고 늙은 뼈들과 눈도! 다니엘이 말하길, 내가 토스카니 시가를 너무 많이 피워서 결국 제3제국처럼 무너질 거라고 해! 그럼 어쩌지?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고, 연금도 없어... 게다가 노동허가도 없고, 체류 허가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카프카 영화[*<계급관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 – 건강 면에서도: 몇 달간의 준비, 31명의 배우, 12주간의 촬영 (74,800m의 네거티브 필름 중 절반 이상이 필름랩에서 파기됨), 그 중 절반이 야간 촬영이었고 (평균적으로 하루 3~4시간밖에 못 잤어), 12주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편집 (오후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리고 함부르크와 파리의 필름랩들과의 전쟁…
우리는 U-matic[비디오 카세트]가 없어.


(다니엘 – 타자로 작성)

그런데 혹시 스웨덴 TV[STV]를 통해 “공식적으로” 헤센 방송(Hessischer Rundfunk)에서 방영한 방송의 복사본을 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6개월 전에 그들에게 양질의 35mm 프린트를 줬거든! 만약 가능하면, 디트마어 쉉스(Dietmar Schings)에게 보내줘. (그가 담당 “편집자”야 – 그리고 친구이기도 해.) 그의 개인 주소는: Wolfgangstrasse 104, Fr./M.
또 다른 방법(????): 스웨덴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건 어때? 에노 파탈라스(Enno Patalas)가 뮌헨 영화박물관에 프린트를 갖고 있어. 아니면 함부르크 필름하우스 사람들(그래도 스톡홀름보다는 가까우니까!) – 그들에게도 우리가 좋은 프린트를 줬어. (베를린에서 상영된 버전이야.)

담당자: 디터 코슬릭(Dieter Kosslick), 필름하우스(Filmhaus)
주소: Friedensallee 7, HH
전화: 391747

스웨덴 시네마테크가 우리 죽기 전에 우리 영화 딱 한 편만 튼다고 해서 망하지는 않겠지? (아니, 혹시 그렇게 되나?) 흑백 영화야. 화면비 1:33. 상영 시간: 2시간 7분.
이 영화와 그 제작 과정에 관한 책이 피셔 출판사(Fischer Verlag)에서 막 출간됐어. 아직 보지는 못 했어. 사진도 포함돼 있다고 해. 제목은 Klassenverhältnisse[*<계급관계>]…
너희 부부 모두에게 포옹과 입맞춤을 보낼게. 너희는 다시 파리나 로마에는 안 오는 거야?
우리 고양이 미스티(Misti)가 우리가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어. 13년 반을 살았고, 1년간 암과 싸웠어.
강이지는 잘 지내. 아직도 미스티를 찾고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