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 일환 인터뷰 전문
인터뷰이: 일환
인터뷰어: 조현나 씨네21 기자
정초해두어야 할 것은, 디지털 세대와 그 이전을 구분하지 않고는 동시대 시네필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카라가르가(karagarga)의 출범 이후, 몇몇 스캔되지 않은 필름 영화를 제외한 (실질적으로) 모든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발굴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에 익숙한, 그리고 이에 관한 해외의 여러 정보를 탐색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그러한 젊은이들에 의하여 호명되는 영화의 범위와 깊이가 확장되었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시네마테크에서는 젊은이들을 정말 흔하게 만나볼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시네마테크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칠 수 있었던 동나이대의 몇몇 이들, 그리고 letterboxd나 Instagram 같은 SNS에서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과 접촉하여 친분을 쌓게 된 것이 ‘로트링겐’의 시작입니다. ‘로트링겐’이 연혁을 쌓아가는 과정과 동일한 시기에, 시네필 문화의 자장 속에서 여러 기획 상영 혹은 팬픽 카드뉴스들이 SNS에 쌓여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시네마테크를 향한 젊은이들의 발걸음도 늘어난 것이겠죠.
이처럼 ‘로트링겐’은 기성-영화교육/엘리트-영화계 외부의 시네필들에 의한 협동 창작 집단을 희구하며 출범했습니다. 저희는 동시대 여러 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상영되는 (전형적인) 작품들로부터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이들이기에, 형식적으로 실험적이면서도 영화사의 유구한 성취를 배반하지 않는 작업들을 제작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부터 실험영화까지 모두 탐구하는 까닭도 다름이 아니죠. 그리고 이러한 광범위한 공부는 앞서 말씀드렸듯 디지털 세대의 특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로트링겐’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함에 따라 프로이센으로 할양된 비운의 지역입니다. 영화감독 장 마리 스트로브가 이곳 출생이고, 부인인 다니엘 위예와 함께 <로트링겐!>(1994)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행정 처리에 의하여 정체성을 위협받은 땅 위 사람들의 역사, 이 지점이 소속에 대한 애착 없이 자유롭게 영화와 함께하고자 하는 저희들의 정신과 공명한다고 여겨 시네클럽을 ‘로트링겐’이라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유도 지배적이었는데요, 필립 가렐이 주축이었던 협동 영화제작 조직, ‘잔지바르’(Zanzibar)’처럼 지명을 원했고, 칠레 실험영화 감독 프란시스코 로하스가 ‘중앙지역(La Région Centrale)’이라는 시네클럽을 운영해온 것처럼 애호하는 영화의 이름을 빌리고도 싶었습니다.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름이 ‘로트링겐’이었던 것이죠.
김동건, 인지용, 한채연 작가 등 팀원들과는 어떤 목표를 갖고 함께 활동하게 되셨나요?
저희가 놓여 있는 환경에서 최선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공동의 목표입니다. 금전적으로 열악한 환경일수록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영화 제작이 가능합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이탈리아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정확히 동일한 발언을 했는데,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규모의 제약 속에서 최대의 자유를 이끌어내려 아이디어를 고안하는 과정은, 단순히 영화제작만의 영역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라고도 생각합니다. 저희는 본인이 놓여 있는 환경에서만 발생시킬 수 있는 창작을 사유하고 이행하는 것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힘과 직결된다고 믿습니다. 훗날 상업 제작환경에 점입하게 되면, 그 때도 같은 믿음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로트링겐’의 주된 활동(상영회, 스터디 등)에 관해서도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각 활동 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도 있으신가요?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를 공부함에 있어 최우선이기 때문에, 상영작을 고를 때는 구성원들의 프로덕션에 도움이 될 법한 영화들을 주로 상영해왔습니다. 가령, 작년 ABBFF 병영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로트링겐 구성원의 작품 세 편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구조주의 영화들, 그리고 피터 허튼, 나다니엘 도어스키, 로버트 비버스, 고다르의 90년대 이후 작품들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모두 로트링겐에서 주요히 탐구했던 영화들이었죠.
작품을 상영회뿐만 아니라 전시 형태로 소개하는 이유도 있으신가요?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영화 그리고 영화가 아닌 비디오, 둘은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양자는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는 흥미로운 여정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피터 허튼, 페드로 코스타, 차이밍량 등등처럼) 영화가 갤러리에서 우아하게 성립한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까지는 미술 기반의 비디오 작업이 영화로서, 혹은 영화관에서 설득력 있게 현현한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비내러티브 실험영화가 미술관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최근 들어 선명히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국내는 해외에 비하여 핸드메이드 필름이나 실험영화에 대한 팬층이 희박하고, 별도의 재단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와 상호작용하며 작업할 수 있는 (미술 기반) 환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저희 로트링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경로로든 개인 영화제작자들이 필모그래피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겠죠. 이전 세대의 뛰어난 국내 실험영화 감독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교직이나 관련 직위를 얻고 작업을 중단한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상영회, 전시 외에도 ABBFF병영영화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BBFF 병영영화제는 매년 전라남도 강진군 전라병영성지에서 진행되는 실외 영화제입니다. 2024년 제 1회 ABBFF는 로트링겐의 운영 하에 스트로브-위예, 제롬 하일러, 로즈 라우더, 이장욱, 장민용을 포함한 총 16명의 영화예술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이틀 동안 8개의 나라에서 제작된 총 21편의 영화들이 드넓은 병영성의 하늘 아래에서 상영되었습니다.
ABBFF 병영영화제의 롤모델은 테메노스[The Temenos]가 그리스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실외 스크리닝 행사입니다. 세계의 많은 시네필들이 자연 한가운데서 영화를 선사하는 테메노스의 풍광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고는 합니다. 이처럼,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며 서서히 변해가는 하늘의 색상, 그리고 그 창공 밑에서 자리를 지키는 스크린과 영화 이미지. 저희가 영화제를 처음 계획할 때부터 구현하고자 했던 아이디어였습니다. 태양이 진 후,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에게도 관객들의 시선을 나눠주고자, 작년 첫 회에서는 밤시간대에 주로 무성 실험영화들을 편성했습니다.
ABBFF 병영영화제는 로트링겐 구성원들이 제작한 영화를 공개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로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작품 상영의 창구를 개발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기존에 쉽사리 접하기 힘들었던 위대한 작품을 공식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작년 첫 회에서는 이장욱 선생님, 제롬 하일러, 로즈 라우더의 작품들이 해당 경우에 포함될 것 같습니다. {첫 영화제의 첫 영화로, 스트로브-위예의 <로트링겐!>(1994)을 상영했던 것은 저희 모두에게 유의미한 기획이었습니다.} 더하여, 미술 기반의 비디오 작업들에 밀려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동시대의 뛰어난 실험영화들을 여러 나라의 작가들로부터 제공받아 상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영되는 영화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저희가 어떠한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좋아하고 있는지가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 예상합니다. 올해부터는 실험영화 뿐만 아니라 극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를 포괄하여, 기라성 영화제에서 외면하지만 너무나도 뛰어난 영화들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어떠한 영화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장비와 더불어 상영되는 영화들에 대한 대금 지불이 필요합니다. 로트링겐 내부적으로는 스무 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 그것도 실외 영화제를 운용하기란 금전적인 이유에서든 행정적인 이유에서든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전부터 영화 관련 문화행사를 꿈꾸시던 ABBF 사 사장님들께서 강진군 병영면에 양조장을 신설하시게 되었고, 그분들의 주관 및 투자에 따라, 영화제를 난항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테메노스처럼, 먹거리와 별빛 그리고 영화가 함께하는 낙원의 풍경은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영상자료원, 한양대, 성균관대 등 상영공간 섭외 시에 현실적으로 부딪혀 온 문제들도 있으신가요? 공간을 한 곳으로 정착할 생각도 있으신지요?
어느 곳이든 영원한 정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주어진 공간의 장소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편이 영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활동의 타깃층도 선정되어 있나요?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없는 것 같습니다.
로트링겐을 지속하기 위해 수익 확보 등, 고려하고 계신 지점이 있다면요?
로트링겐 구성원들의 작품이 쌓이면 로트링겐 제작 영화들로만 정기적인 영리 목적의 상영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현재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가는 마이크로시네마(비제도적 시네클럽)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어떤 가능성을 지녔고, 반대로 현 시점에서 느껴지는 한계점도 있다면 함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2020년대 이후 디지털 세대, 제도권 외부의 시네클럽 자주상영 미시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안되는 것이 동국대 기반의 차차 시네마테크(이하 ‘차차’)입니다. 저는 이곳의 존재를 누락한 동시대 시네클럽 연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확언할 정도로 차차를 근원적 장소라 생각합니다. (차차는 이제 더 이상 운영되지 않습니다.) 차차는 로트링겐 구성원들이 함께 방문하고는 했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선 차차가 시기적으로도 현재의 마이크로시네마 흐름보다 일찍이 도래한 시네클럽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단지 연보의 맥락으로만 차차의 중요성을 호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곳은 시네마테크나 아트하우스에서 자주 상영해주지는 않지만, 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이 주요한 비내러티브 영화들을 동시대 시네필들에게 소개하는 선구자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차차는 단순한 극장 경험 제공의 역할을 넘어, 동시대 시네필들의 지평의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더하여, 당시 차차의 프로그래머는 영화를 소개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다했는데, 왜냐하면 샹탈 아케르만, 마르그리트 뒤라스, 페드루 코스타, 스트로브-위예, 안토니우 헤이스 등등, 저명한 거장들의 대표작 대부분의 한글자막을 직접 제작하여 제공하는 역할을 이행했습니다.
이처럼 시네클럽의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상영할 수 있는 영화들이 있고, 디지털 세대이기에 제공할 수 있는 희귀한 자료 및 정보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곳들을 장소 삼아 도처의 시네필들이 집결되기에, 전례 없는 사건을 발생시킬 화학적 가능성도 생겨납니다. 예를 들자면, 차차의 프로그래머였던 박규재 작가가 현재 로트링겐과 함께 ABBFF 병영영화제를 운영하는 것처럼요.
현시점 제도권 내외의 시네클럽들로부터 감지되는 문제의식이 있기는 합니다. 초법 상영에 대한 난점은 차치하고서라도, (SNS-군중)문화의 흐름에 결속되어 특정 비평가의 취향이나 특정 감독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숭배의 문장들이 쏟아질 때 그러합니다. 비제도적 시네클럽에 위치되어 있는 집단의 경우, 시네필 문화의 요람 안에 종속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위치가 가지는 정치성을 이해하여 행보를 연쇄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 제작, 영화 상영회 프로그래밍 양자 모두에 해당해서 말입니다. 영화 외 사회의 여러 비제도 집단과 힘을 합쳐 확장해 나아가며 새로운 시공간을 창시해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믿습니다.
‘자크 리베트’ 전작전 등 연초부터 바쁘게 활동 이어가고 계신데, 그밖에 앞으로의 로트링겐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 2회 ABBFF 병영영화제를 작년보다 더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당장은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 영화 외부의 다양한 단체들, 가령 여러 저항적인 단체들과 협업하여 상영을 계획해보고도 싶습니다.
또한 노련해진 로트링겐 구성원들이 각자의 영화에 천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와 인지용 작가가 공동연출로 장편 내러티브 영화 하나를 제작 중인데, 이 또한 현재 로트링겐의 주요 프로젝트라고 소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영화와 관련된 문화행사가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지는 영화의 자체의 힘이 가장 주요하다는 진리를 전제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