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지 그것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모라 맥기니스 × 마르틴 루세

2006-2016

일환 옮김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찍을 때, 나는 나무의 시간을 바라보고 그 시간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단지 그것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 마르틴 루세

우리의 첫 만남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르틴 루세는 자신의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리옹을 방문했었다. 몇 년 후, 나는 프랑스에서 비상업 영화 분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주연들이 이를 어떻게 구축해왔는지를 다루는 연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세 역시 그 주연들 중 한 명이었기에,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2006년 여름, 우리는 파리의 한 나무 아래에서 저녁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1970년대 초반, 자신과 동료들이 어떻게 영화 창작 도구들을 직접 손에 쥐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조직을 형성하여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자신의 영화들을 지켜왔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근에 다시 이어간 그 인터뷰의 내용이다.

-모라 맥기니스
70년대 영화 협동조합

마르틴 루세: 저는 아주 일찍 실험영화를 접했습니다. 파리의 영화학교에 들어오자마자 Collectif Jeune Cinéma(CJC)와 훗날 시네아스트 협동조합(Coopérative des cinéastes)을 만들어갈 영화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첫 영화들은 77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우연히 CJC의 상영회에 참석했는데, 마침 단체가 분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들을 보았고, 곧바로 파트리스 키르히호퍼(Patrice Kirchhofer)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협동조합을 창설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죠.시네아스트 협동조합은 상업영화와 단절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Cinéma Différent와도 단절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었고, 동시에 매우 투쟁적이었습니다. 저희가 ‘실험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영화적 동지들과 함께 결속하려 했고, 기존의 체제와 단절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언어적·제도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죠. 저희가 실험영화에 대한 이론들로 잘 정의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주: Collectif Jeune Cinéma는 1970년대에 파트리스 키르히호퍼의 주도로 Cinéma Différent라는 제목의 혁신적인 잡지를 창간했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중요한 그룹이 두세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파리 필름 코옵(Paris Film Coop)으로, 주로 대학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저희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죠. 그리고 또 하나가 무척이나 활발하고 갈등이 많았던 Collectif Jeune Cinéma였습니다. CJC에서 나온 분리파들과 새로운 젊은 필름메이커들이 모여 시네아스트 협동조합을 창설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작업했던 것은 아니었고, 다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활동했습니다.

여성 영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비비안 오스트롭스키(Vivian Ostrovsky)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시네 팜므 인터내셔널(Ciné Femmes International)을 통해 배급을 담당했습니다. 그 때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격동의 시기였지만, 지금처럼 명확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죠. 마치 마녀의 가마솥 같았달까요.

저희는 시네아스트 협동조합에서 제도와 단절된 상태를 격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퐁피두(Beaubourg)가 컬렉션을 만들기 시작하려 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영화를 팔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칠리 마자랭(Chilly Mazarin)으로 가고 싶었고, 더 교외로 가고 싶었고, 더 먼 곳으로 행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협동조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유지향적인 태도였습니다. 그것은 70년대 운동의 잔재와 맞물려 있었죠. 막강한 저항 의식이 있었고, 그 대상이 반드시 영화 자체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저희는 영화 작업을 하면서 “이게 실험적인가, 아닌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필름 코옵은 이미 실험영화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정밀한 정의를 내리고 있었습니다만, 저희는 무엇보다도 제작 시스템과 산업적 언어와의 단절을 도모했습니다. 저희는 모두 주변부의 이야기에서 왔지만, 자아도착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죠. 그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특정한 장르에 속해야 한다는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죠. 저희는 실험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며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작은 갤러리들에서 저희의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당시에는 영화제도 거의 없었고, 저희는 저희의 작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저희는 여러 이견들을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표하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 조직들과의 관계도 항상 뜨거웠죠. 저희는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자유로움은 이후에 좀 더 틀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때는 온갖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노게즈(Noguez)는 온 힘을 다해 바디 필름을 밀어붙였고, 카타리나 토마다키(Katarina Thomadaki)와 마리아 클로나리스(Maria Klonaris), 테오 에르난데스(Teo Hernandez)와 바르베스 로슈슈아르(Barbès Rochechouart) 그룹이 있었습니다. 클로딘 에이지크만(Claudine Eizykman)은 『영화적 향락(La jouissance cinéma)』을 출간했습니다. 뱅센(Vincennes) 대학에서도 논의가 있었지만, 저희는 그것과 크게 의견이 맞지 않았죠.

파리 필름 코옵은 지배적인 그룹이었고, 대학 출신의 이론가들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그들의 입장을 반박하고 반대 입장에서 서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숨 쉴 공간이 필요했고, 자유가 필요했으며,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오히려 ‘가난한 영화’에 가까웠습니다. 자유롭고 가난한 영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파리 필름 코옵의 이론적 압박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후에는 변화가 있었고,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들이 정치적 성찰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만, CJC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계속 대화를 나누고 했습니다. 저희는 예르(Hyères)로 가서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저도 가끔씩 갔습니다. 저희는 서로 알고 지냈고, 공공장소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같은 장소에서 어울렸습니다. 저는 마르셀 마제(Marcel Mazé)와 항상 좋은 친구 사이였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희를 웃고 즐기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았죠.

그 후에 상황이 바뀌었어요. 이 이야기는 70년대 말의 이야기입니다. 협동조합은 4~5년 동안 지속되었죠. 네, 그것은 일종의 협회였습니다. 그곳에는 영어를 담당하던 데이비드 와리(David Wharry), 욕조에서 영화를 만들어내던 키르쇼(Patrice Kirchhofer), 〈시네마통〉(1978-, Cinématon)을 막 시작하던 제라르 쿠랑(Gérard Courant), 그리고 이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뤽과 지젤 마이힐러(Luc et Gisèle Meichler), 가끔씩 들르던 모리스 르메트르(Maurice Lemaître)도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그를 ‘지독한 마초 꼰대’라고 부르며 격렬히 말싸움을 하곤 했죠. 또한 파리 필름 코옵에도 몸담고 있던 프랑신 아라켈리앙(Francine Arakelian)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엄격하게 구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논쟁과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동시에—어떻게 말해야 할까요—삶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쳤고, 잊지 못할 토론과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시기에 저희는 로즈 라우더(Rose Lowder)와 알랭 쉬드르(Alain Sudre)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비뇽에서 여름에 미팅을 주선했습니다. 거기에는 모두가 모였죠. 하지만 그들은 당시 어떤 협동조합에도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벌어진 일들은 70년대의 잔재이자 다가올 80년대를 준비하는 과정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희 협동조합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생명을 유지했죠. 키르쇼가 더 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체의 핵심적인 존재였죠. 그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 초반이 되자 우리는 멈춰야 했습니다. 협동조합은 해체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일을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완전히 그만두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계속 카메라를 붙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집단 행동의 불가능성, 라이트콘(Lightcone)

MR: 큰 난제들이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가장 제도에서 벗어난 주변부 공간에서 영화를 배급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물들이 제도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거부하는 태도이기도 했어요.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큰 계획이 있었습니다. 키르히호퍼(Kircho)가 “작업실을 만들어야 해”라고 말했죠. 우리는 런던 필름 코옵(London Films Coop)과 아주 친했습니다. 스티브 패러(Steve Farrer), 리즈 로즈(Lis Rhodes), 그 무리와 친구였고, 자주 런던에 가곤 했습니다.

그 시절, 프랑스에서 작업실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기계장비에 엄청난 돈이 들었어요. 그게 저희 목표 중 하나였어요. 어떤 이들은 이론적 성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고, 배급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에이지크만(Eizykman)은 작업실을 원하지 않았고, CJC는 그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었죠. 돈이 없었어요. 지금은 기계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어요. 그것이 넘어야 할 목표 중 하나였죠.

그러다가 그 대규모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아주 안 좋게 흘러갔어요. 거기서부터 뭔가 좀 망가졌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이 사람들의 사기를 꺾었어요.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가 조금씩 물러났죠. 콜렉티브는 해산되었고, 그러자 얀 보베(Yann Beauvais)가 라이트 콘(Light Cone)을 창립했습니다. 협동조합의 많은 사람들이 얀과 마일스(Miles)가 만들고자 했던 조직으로 이동했습니다.

** 1978년 9월 9일과 10일, 리옹에서 CNC의 후원 아래 개최된 학술회의로, 당시 활동 중이던 여러 콜렉티브가 참여하여 산업 밖의 영화에 대한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다.

얀은 파리 필름 코옵과도 결별을 원했습니다. 그는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마일스 맥케인(Miles McKan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빠르게 그들과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시네 팜므 인터내셔널의 비비안 오스트롭스키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죠.

얀과 마일스가 생각한 ‘실험영화’에 대한 비전은 폭넓고 박식했으며, 역사적 일관성에도 큰 비중을 두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닫혀 있지 않았죠.

강렬한 개방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미친 듯한 일이었습니다. 그 협회는 엄청난 노동이었어요, 정말 정신 나갈 정도로요. 저는 얀과 마일스가 거의 10년 동안 하루 24시간 내내 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도 받지 않고요. 여기저기서 다른 일들을 하면서, 정말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정확한 연도를 말할 순 없지만, 이 분야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아마 84년이나 85년쯤일 거예요. 바로 그때 라이트콘이 창립되었죠. 정말이지, 라이트콘의 탄생은 몹시 중요한 사건죠. 그 강한 에너지는 확실히 그 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온갖 대안적인 공간에서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얀과 마일스가 워낙 열심히 했거든요. 그리고 조금은 퐁피두에서도 상영했어요. 우리 청춘 시절의 강렬한 반항심이 조금은 누그러졌죠. 아쉽긴 해요. 아직도 후회되지만, 평생을 *파타고아스(Pataugas) 신발만 신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역주: 파타고아스 Pataugas 신발은 50년대 등산 및 군보급용으로 제작되었으나, 60-70년대 프랑스에서 반문화 청년, 급진 예술가, 히피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꽤 빠른 시점부터 그들은 해외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를 벗어나 지방과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사람들 사이에 연대를 형성했고, 힘을 만들어냈으며, 이 (비제도적/비산업적) 영화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정립하려는 욕망이 생겨났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고정된 형식으로 붙잡아두려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현대미술

MR: 1980년대가 끔찍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이에요. 작품에 대해 저희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의 작업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어요. 1980년대부터 라이트콘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영화적 흐름이 발전했어요. 비비안 오스트롭스키, 세실 퐁텐(Cécile Fontaine), 마르셀 티라슈(Marcelle Thirache), 프레데리크 드보(Frédérique Devaux), 로즈 라우더 등 많은 이들이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들은 영화의 모든 측면을 고민하며 작업했어요. 필름 작업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급 문제—어디에서, 어떻게 영화를 상영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적 자유를 탐닉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습니다. 라이트콘의 컬렉션은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그리고 열린 자세로 형성되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갈 때, 아무것도 새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저희가 만들었던 잡지 Scratch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업은 4~5년 동안 이어진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이 컬렉션은 이러한 영화들이 다른 현대 예술들과, 혹은 그 외의 예술들과 어떤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발전했어요. 그것은 논란을 일으켰고, 찬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아니오” “예” “어쩌면"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축소하거나 단순히 환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라이트콘의 이 영화들과 다른 예술들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물음은 주된 동력이었어요. 저희는 회화나 음악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 당시에는 비디오 작업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비디오와 영화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훨씬 후에 시작되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회화, 시각 예술가들의 작업, 현대 음악과 무엇을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얀은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두 사람은 이 분야에서 꽤나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죠. 이 작업의 큰 장점은 단순히 이론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빛이 뻗어 나가듯 수평적으로 확장해 나아가며, 지식 안으로 수축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다양한 실천들과 관계를 맺으려 했죠. 꽤 훌륭했다고 봅니다.





비디오와 영화

MR: 꽤 오랫동안 영화, 영화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비디오는 즉시 다른 차원의 것으로 등장했고, 그 차이는 상당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스럽고, 갈등이 있고,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이러한 차이들은 우정과 논쟁 속에서 서서히 섞여갔습니다. 영화와 비디오의 차이가 단순히 매체의 차이인가요, 아니면 언어의 차이일까요? 둘 다입니다! 그렇죠. 차별화에 대한 욕구가 있었지만, 동시에 -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 “비디오는 이것이고 영화는 저것이다”라고 종파처럼 단정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들이 어디서 만나는지도 질문했습니다. 저희는 비디오 아트가 어떻게 실천되는지와는 큰 관련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디오로 작업을 하면서 라이트콘 컬렉션의 특정 작품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작업은 부분적으로 특정 역사를 따른 영화적 접근방식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복잡한 것이며, 그렇게 남아있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이틀 전에 저는 한 젊은 벨기에 작가인 자비에르 크리스티앙스(Xavier Christiaens)의 아름다운 작품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랄해 근처에 가서 〈하얀 낙타〉(2006, La chamelle blanche)라는 정말 아름답고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었는데, 베르토프를 연상시키는 확실한 영화적 계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Mini-DV로 촬영하고 컴퓨터로 편집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복잡한 문제입니다. 접점과 대립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죠. 비디오는 빠르게 제도화되었습니다. 박물관과 예술 시장에 진입했고, 그것은 분명 신생의 것이었으며 매혹적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것만 보이게 될 정도입니다.

반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는 상대적으로 적고, 많은 저항을 견디며 자리를 지켜왔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역사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영화적 문화에서 비롯되지 않고,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은 것입니다.


모라 맥기니스: 동시에 70년대에는 나우만, 아콘치와 같은 미술가들이 필름으로 작업했었습니다. 대부분은 나중에 비디오 작업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은 이미 미술가의 관점에서 움직이는 이미지, 프레임에 대해 질문해왔습니다.


MR: 그렇습니다, 물질과 시간에 대해서요.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실험영화 작가들은 영화적 전통, 영화에서 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갈래의 역사입니다. 당시 퐁피두에서 장-미셸 부우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영화 컬렉션, 즉 영화예술과 관련된 매체, 언어, 계보의 특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영화적 컬렉션이었습니다. 박물관에도 영화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습니다. 박물관들은 비디오 아트로 가득 찬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미셸과 미국이나 독일의 2-3곳을 제외하고는, 박물관과 갤러리들은 매우 빠르게 비디오 아트를 붙잡았고, 그것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 그것이 동시대성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죠. 예술적 진보를 기술적 진보에 종속시켰던 거죠. 그 후 디지털, 멀티미디어가 등장했고, 영화는 계속해서 고루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이 영화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고, 그들은 영화적인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릅니다 - 그것은 그들의 문화가 아니니까요. 박물관 관계자들은 대부분 시네필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을 어려워하고, 그것은 신비롭고, 불투명하고, 외부적인 영역으로 보입니다. 영화의 영역은 거대하고,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보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작은 일화를 들려드리자면: 퐁피두의 '이미지의 움직임'(Mouvement des images) 전시회에서, 예를 들어 어떤 이들에게는 로즈 라우더의 '부케'가 나쁘지 않지만 피슐리와 바이스가 더 낫다고 합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아트는 같은 영역이 아니니까요. 또한, LCD 화면에서 로즈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정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고루한 매체 포멧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고루함이 거기에 있고, 그것은 형이상학이 고루한 것처럼 고루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지층의 축적 속에 있고, 이러한 고루함으로도 현대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음... 역설과 양가성은 여전히 존재하죠.

영화 공간들이 이 문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과연 신경 쓸 필요가 있는지... 미술가들 사이에서 과연 영화적인 것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원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박물관의 예술가들일까요? 저의 경우, 기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제 영화가 DVD로 상영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되도록 16mm 영사기로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만을 정말 바랍니다. 저는 그것에 절대적으로 집착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 우리가 매체에 대해 물신주의적이 되지 않으면서도, 폐쇄적이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유지해야 할 꽤 특수한 영역에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영화적인 것의 특수성에 대한 성찰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작업들은 대부분 전시용 영화가 아닌 상영용 영화들입니다. 물론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더 적절할 수 있는 설치 작품들의 경우는 제외하지만, 필름메이커들의 설치 작품은 미술가들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 경우에는 설치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분야가 아니에요. 저에게 암실은 백지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지는 않겠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들의 존재와 제작에 대해 성찰하고 질문하는 것일테고, 그것이 우리가 필름랩에서 서로에게 시도하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 중략 ...]

라이트콘이 3000편의 영화 컬렉션을 운영하고 미친 듯이 일하는 멋진 사람들에게 작은 급여를 지불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필름랩들이 조금씩 자금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제 영화 대부분은 라이트콘에서 배급하고 있으며, 저는 라이트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들도 있습니다. 제 걱정은 반드시 배급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 만납니다 – 노바(Nova)에서의 만남은 아주 좋았죠. 사람들은 많은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고, 서로를 알게 되며, 새로운 장소들을 만듭니다. 기존 배급사들과 단절되지 않은 대안적 필름랩들의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라이트콘은 이러한 작업들에 완전히 열려있고, 올해 더 많은 영화들이 배급되기 시작했습니다. CJC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영역이 조금 더 넓어졌습니다. 영화제나 박물관에 가는 영화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죠.

MMcG: 당신은 자신의 영화가 상영 성사되게끔 직접 관리하시나요?

MR: 아니요, 저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저를 짜증나게 해요. 저는 제 영화를 한 번, 두 번, 세 번 보여주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직접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처음이든, 세 번째든 항상 어떠한 사람, 상영관 안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나오는 길모퉁이에서 제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말을 걸어주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날 때, 그것은 기적 같아요. 그때야 영화는 진정 마무리되며, 저는 다음 작업으로 넘어갑니다.

저는 (배급일을) 라이트콘과 프로그래머들이 하도록 두었습니다. 저는 작품을 보여주려는 엄청난 의지가 없어요, 그건 제 일이 아니니까요. 작품들은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없고, 제 앞에는 항상 다음 작업이 놓여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도 아주 좋은 경우죠. 자신의 영화가 어디서나 상영되도록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죠. 다만 저는 제 영화가 영화제용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영화들은 너무 길거나 너무 추상적이에요. 저는 그것들을 만들어낸 후,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좋아합니다.





에필로그, 2016

MMcG: "실험 영화"라는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MR: "실험 영화"라는 용어는 적절하지도 않았고, 한 번도 적절했던 적이 없어요. 그 말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모든 예술은 실험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죠. 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자면, 영화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같은 개념일 겁니다. 이 개념은 보다 명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더 열린 시각을 제공합니다.

MMcG: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영화의 ‘공식적’, ‘전통적’, ‘상업적’ 유통망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었죠. 이처럼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러운 성격이 소위 ‘실험 영화’의 본질적인 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MR: 1970~80년대에는 확실히 그러했습니다. 이는 매우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죠. 현재도 일부 예술가들에게는 여전히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빛을 필요로 하듯이, 어떤 이들은 그림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 자체로도 정치적인 것이지만, 훨씬 더 깊은 층위에서의 정치성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체제 안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 늘 경계하며 보이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립과 거리 두기가 필요하죠. 이것이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가 공식적인 네트워크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같은 맥락이에요. 그림자 속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양지에 잘 어울리지 않죠. 거기서는 다 타버릴 테니까요…

MMcG: 여러 집단(collectif)들이나 라이트콘이 여성 영화인들에게 영화 제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방식이 더 쉬웠을까요?

MR: 당시 이 영화인들은 여성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지도라(Musidora), psych et po, 여성해방운동(MLF)을 떠올리는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공유하는 삶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들의 작업 속에서 자유로운 언어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즉각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벗어난 아나키적인 영역을 열어주었죠.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DIY(Do It Yourself)’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성들에게 아주 잘 맞았어요.
이러한 흐름은 이후 라이트 콘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얀과 마일스는 여성 영화인들의 작업에 대해 매우 세심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죠.

MMcG: "검은 상영관은 백지와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MR: 내게 있어서, 필름 이미지가 지닌 ‘자국’(empreinte)이라는 본질적 특성은 그것을 하나의 ‘기록적인’(inscriptive) 이미지로 만듭니다. 이 단어(inscriptive)는 사실 존재하지 않지만, 신경 쓰지 않아요. 나는 그것을 ‘성서적’(scripturale)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영화는 하나의 ‘기록’이며, 특히 16mm 필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장의 종이처럼 고유한 안정성을 지니고 있어요. 다만, 나는 그것을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읽혀야 하는 무엇이죠.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는 한 작가가 떠오릅니다. 조용한 문인이었던 제라르 마세(Gérard Macé)가 쓴 「이집트인의 최후(The Last of the Egyptians)」이라는 책인데, 거기서 그는 장프랑수아 샹폴리옹(Champollion)이 어떻게 로제타 스톤을 해독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샹폴리옹은 어린 시절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익혔다고 하죠.

MMcG: 당신에게 영화란 형이상학처럼 원시적인 것인가요?

MR: 네, 영화는 그 깊은 뿌리에서 원시적인 것입니다. 영화의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자국’입니다. 그것은 부재와 존재를 이야기하는 기억의 이미지죠. 그리고 그것은 최초의 양각과 음각, 즉 ‘양(陽)과 음(陰)의 손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현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성이란 언제나 뿌리와 계보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죠.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광고’라고 부릅니다.

MMcG: 리옹에서 당신이 했던 말이 기억나요. 이제는 디지털 도구에 충분히 익숙해져서 디지털 들이 다른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했죠. 그 방식이 물리적인 걸까요, 아니면 프로그래밍적인 걸까요?

MR: 아니요, ‘강제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아요. 도구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 나는 디지털 촬영의 물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카메라들을 사용해서요. 아주 기본적인 장비들로 작업하는 것이죠. 내가 발견하는 것들은 일반화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그건 확실해요.
도구는 언제나, 그리고 언제나 다르게, 제조업자가 정해놓은 용도를 넘어설 수 있어요. 그것은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자신이 따라야 할 로드맵을 외면할 수도 있죠. 허용된 노출 범위를 넘어가고, 정해진 설정을 무시하고, 사용 설명서를 벗어나면서 말이에요.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의 빛이 개입하면, 디지털 이미지의 무언어적인 조형성이 흐트러지고, 시대의 소문(rumeur)이 됩니다. 코드가 탈선하고, 셈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계산하려 하다가 결국 뒤틀리고, 깨지고… 그리고 그 계산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순간, 빛이 형체를 얻으며 드러납니다.
그렇게 탄생하는 것은 ‘메아리 같은 이미지’, ‘소문 같은 이미지’, ‘시간 저편의 이미지’예요. 마치 그것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요. 과거와 미래의 원자들이 소용돌이치죠. 이렇게 가능성의 한계까지 밀고 나가면, 이 도구는 특정한 영화 작업에 딱 맞는 붓처럼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것을 ‘속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건 말장난일 뿐이죠. 오히려 그것이 알고 있는 빛의 방향으로 놓아두는 거예요.
즉, 이 도구를 하나의 조력자로 신뢰하는 것이죠. 그것을 제한하는 기술적 설계를 넘어, 효과를 계산하려는 시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말이에요. 맞아요, 나는 ‘외면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빛이 코드 위에서 우위를 점할 때, 이 도구는 필름 이미지가 보지 못하는 영역으로 홀로 나아갑니다. 기억을 넘어, 반대 방향으로 흐르면서요. 그때, 그것만이 부재와 망명(Exil)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