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스노우 × 아드리아노 아프라
1972년 9월 10-17일
일환 옮김
마이클 스노우: 네, 약 10분 길이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파장>(1967)이 줌을 분석했던 것처럼 달리(Dolly) 움직임을 분석하는 작품입니다. 실내에서 촬영했고, 일종의 정물화인데 완전히 정지된 이미지는 아닙니다. 제목은 테이블 탑 달리(Table Top Dolly)가 될 수 있겠네요. 다른 가능한 제목들로는 아침식사(Breakfast), 단안경(Monocle), Acclusion, Eye Teeth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빛을 소비하는 영화입니다. (후에 완성된 영화는 {Breakfast (Table Top Dolly), 1976, 15분}이라는 이중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AA: 당신의 많은 영화들에서 방향성이 설정되어 있고, 때로는 필연의 느낌이 동반됩니다. <뉴욕 아이 앤 이어 컨트롤>(1972)에서 차 안에서 보이는 풍경, <파장>의 줌, <–––>(뒤 그리고 앞, 1969)과 <중심지대>에서의 시간 경과(하루), <사이드 시트 페인팅스 슬라이드스 사운드 필름>(1970)에서 여러 그림들의 연대기 등이 생각나는데요. 하지만 <파장>처럼 이 여러 "필연적인" 방향성들은 중단되기도 합니다.
MS: 그것들이 진정한 중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화 구조의 필수 요소입니다. 어떤 면에서 <파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미리 예고되고 메아리처럼 잇따라 오는데, 마치 수면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장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화면에 들어오는 것은 외화면 소리로 예고되고, 그가 바닥에 쓰러진 후에는 갑작스러운 이미지 변화가 잇따라옵니다. 이것은 그의 추락에 대한 반향처럼 반작용하는 것이며, 시각화된 음파입니다. 물론 이는 단지 한 예시일 뿐입니다만.
AA: 당신의 영화들에서는 기하학의 고전적 개념이 도전 받고 있습니다.
MS: <파장>에는 두 가지 극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깊이가 있는 공간을 본다는 환영, 즉 방을 보고 있다는 환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채화된 빛 외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많은 가능성들이 제시됩니다. 때로는 화면에 순수하게 색만이 보여지는데, 이는 필름 현상의 본질, 즉 평면 위의 색채화된 빛에 해당합니다. 이 영화는 매우 깊은 공간감각의 환영으로 출발하여 평면적인 것으로 귀결됩니다. 어떤 순간에는 리얼리즘 용어로 설명될 수 있는 영화고, 다른 순간에서는 매우 구상적이고 물질적인 영화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 공간 자체가 아니지만, 그것은 실재적으로 색채화된 빛이며 동시에 우리는 실제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영화, 빛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AA: 영화 외의 당신의 (예술) 활동에 대한 성찰처럼 보이는 두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음악과 관련해서는 <뉴욕 아이 앤 이어 컨트롤>, 회화와 관련해서는 <사이드 시트 페인팅스 슬라이드스 사운드 필름>인데, 특히 "평면성"의 개념과 연대기적-전기적 의미에서의 시간 개념이 돋보입니다.
MS: 저는 소리-이미지의 관계에 매우 관심이 있고, 이것이 아직 완전히 실험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뉴욕 아이 앤 이어 컨트롤>에서 저는 소리와 이미지가 명확히 구별되지만 동시적인 두 항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몹시 감정적이고 복잡한 소리와 무척 차갑고, 절제되고, 고전적인 이미지.
<사이드 시트 페인팅스 슬라이드스 사운드 필름>은, 가상의 관객이 매우 안 좋은 위치에서, 매우 측면의 좌석에서 스크린(슬라이드들)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그는 사각형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대상을 매우 좋지 못한 형태로 봅니다. 목소리가 크기와 함께 피사체의 제목과 날짜를 알려주기 때문에 [본래 사각형 슬라이드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소리는 느려지고 밝기는 어두워집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관객은 영화관에서의 실제 위치[인지적으로 고정되어온 매우 안 좋은 위치가 아닌 실제로 앉아있는 좌석의 감각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 소리는 점차 빨라지고 이미지는 더 밝아져서, 스크린이 하얗게 되며 화면이 검었을 때와 평행한 무언가를 만들어냅니다. 이 지점은 허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두 요소의 중첩입니다. 보는 것이 불가능한 슬라이드와 회화보다, 영화*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역주: <사이드…> 영화 한 편이 아닌 영화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문장이다. 따라서 <사이드…>에서 보여주는 슬라이드들보다 영화로서의 작품 자체를 더 강조하는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AA: 당신의 영화들에서는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가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만, 매우 특이한 것으로, 특정한 종류의 허구를 도입하거나, 방향을 잡거나, 관여하는 무언가입니다. <뉴욕 아이 앤 이어 컨트롤>에서는 "걷는 여인" 조형의 존재로 **"방해받는" 풍경을 자동차로 여행하는 것이고, <파장>에서는 카메라의 눈이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지나쳐가며, 거의 히치콕적인 서스펜스의 음모를 암시합니다. <–––>(뒤 그리고 앞)에서는 방해하는 대상으로서 카메라의 존재가 두드러지는데, 외부의 경찰관이 카메라 렌즈-우리를 바라볼 때 그러합니다.
**역주: 여기서의 방해란 영화 외부의 장치가 이미지에 개입하여 허구성을 은밀히 드러냄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심지대>에서는 영화 이미지가 곧 인간의 시상(視像)이라는 개념이 [바닥면에 드러나는] 카메라의 그림자로 인해 약화됩니다. 이 개념은 관객이 영화 내로 무의식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유도됩니다. 즉, [<중심지대>에서] 관객과 카메라의 눈 사이의 동일시 과정 자체가 손상되지는 않지만, 그 눈은 기계적인 눈, 광학적인 것으로 변형(혹은 현현하게)됩니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 안에 있지만 기계로서 있는 것이고, "인간"이 아닌 "기계"로서 생각하도록(보도록) 강요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적 눈의 인간화에 기초한 영화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모순됩니다.
MS: <중심지대>에서 사람들은 즉시 카메라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아마도 목격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미 궁금해하고 있을 테니, 그림자는 일종의 흔적이나 단서로서 제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제 생각에, 다른 것들에 몰입하게 되어 그림자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림자가 영화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AA: 회전하는 그림자는 "공상과학"적 요소를 도입합니다.
MS: "공상과학"이 아닙니다. "허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AA: 하지만 저는 공상과학보다는 첫 달착륙의 생중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MS: 그것이 저를 매우 짜증나게 했습니다. 제가 탐구하고 싶었던 아이디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심지대>는 공상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사용하는 영화입니다. 결국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모든 영화는 기계를 사용합니다. 다만 제가 그 기계를 다른 기계 안에 넣은 것뿐입니다. 의미는 스크린에 있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습니다. 예를 들어 밥 코완(Bob Cowan)은 Take One에서 <중심지대>에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들이 있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영화를 만들 때의 생각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AA: 공상과학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당신의 영화들에서 우리가 모든 휴머니즘, 이미지 생산을 주관하는 "자아"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을 목격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메라의] 눈은 더 이상 (영화감독의) 영혼의 창이 아닙니다. 물질을 보는 (살아있는) 눈이 아니라, (그것을 봄으로써 알게 되고, 생명을 부여하고, 인간화하는,) 다른 물질을 기록하는 유기적 자율성을 지닌 물질입니다.
MS: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는 피아노와 같습니다. 시중에 그런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연주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해야 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종류의 음악을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 말입니다. 결국 악기도 기계입니다. "자아"에 대한 담론에 관해서는, 저는 관객 스스로가 영화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에 매우 민감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 말입니다. 당신들의 독자성을 의식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에서 소리는 특별히 기계적인데, 카메라를 구동하는 모터의 직접적인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AA: 영화는 15세기 회화의 원근법 법칙에 맞추어 광학을 구축했고, 이에 따라 하나의 시점이 유일한 시점이 되었으며, 결국 ‘신의 눈’이라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저에게는, 당신의 영화가 이러한 광학과 이데올로기에 특별히 반하여 작업하면서 그것들을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MS: <파장>에는 예측 가능한 공간이 있습니다. <–––>에서는 우리가 앉아서 특정한 방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스탠다드 타임>(1967)에서는 관객이 중심이 되고, 실제로 환경적 관여가 없더라도 은유적으로 우리는 중심에 있다고 느낍니다. <중심지대>에서 이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중심에 있는 방식은 특별합니다.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사람은 점, 더 정확하게는 무(無)와 같습니다. 4차원에서 3차원, 2차원, 1차원, 그리고 무로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심이고, 그것이 당신입니다. <중심지대>에서는 어쩌면 종교적 유형의 감각과 관련된, 실제 무의 중심에 있다는 감각과 같은 특정한 정신 상태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 중 하나였지만,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인식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AA: "자아"의 무(無) 화는 현대 예술의 많은 부분에서 공통된 관심사입니다.
MS: <중심지대>에는 매우 건전한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보고 듣기만 하는, 무언가가 일어났거나 보았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정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A: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물질적인 것입니다.
MS: 아, 그렇습니다.
AA: 당신은 종교적 경험의 한 유형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경험의 물질성에 감명을 받습니다. 어쨌든, 저는 거기에서 어떤 신비주의도 보지 못합니다.
MS: 아니요. 제가 종교적 경험이나 그와 비슷한 것에 대해 말할 때, 저는 매우, 매우 명확한 것, 순수한 현상을 볼 때 느끼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반응도 옳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순수한 현상, 세상에 있는 물체처럼 존재하는 것들을 만듭니다.
AA: 제 의견으로는, 관객의 그러한 "가용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경험의 물질성에 의해 교정됩니다. 관객은 당신의 모든 영화가 보여주는 작업에 대해 스스로를 눈멀게 하지 않는 한, 일반적이고 이상적으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당신의 많은 영화에 잠재된 시공간 연속체의 특정한 아이디어를 중단하거나, 모순하거나, 비판하는 편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특히 <–––>에서 파노라마 움직임을 중단하는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MS: <–––>는 매우 타격적이고, 매우 강력한 영화입니다. 소리와 이미지가 매우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죠. 편집의 유형도 이 영화의 타격성에 참여합니다. 저는 앞뒤로의 움직임이 중단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제가 구축한 시스템의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어떤 면에서, 당신은 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는 행동과 반응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응 중 하나가 편집일 수 있습니다. 제 영화들에서저는 단순히 시스템의 작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시스템에서 고려하는 어떤 요소는 어쩌면 오류이고 그것이 제 작업입니다.
<파장>의 경우, 사람들은 종종 제가 왜 줌 움직임을 조절하기 위해 모터[기계식-포커스]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 의도는 부드러운 줌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AA: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은 추상적이더라도 벡터적인 기대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파장>이 맞은편 벽에 이르며 끝날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는 항상 파노라마 움직임으로 진행될 것이고, <중심지대>는 오직 회전 움직임만을 보여줄 것임을 선지합니다. 이것은, 그런데, 많은 관객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설명하기도 할 것입니다. 몇 분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끝을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는 합니다. 사실, 이 영화들에서 이러한 기대는 좌절되고, 변형되게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시작과 추정되는 끝 사이의 영역에 있다는 점, 이것이 영화의 작업입니다.
MS: 그것은 우리의 인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끝이 무엇이 될 것이고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AA: <중심지대>의 X들은 어떻습니까? 그것들은 마지막 편집에서 잘려나가도록 계획되어 있던 잔재처럼 보이지만, 영화에 남아있습니다.
MS: 당신은 그 X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나요? 그것들은 움직이고, 떨리고, 맥동합니다.
AA: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MS: 그것들은 촬영 블록들의 중간에 존재하고, 영화의 모든 것이 움직임이기 때문에, 이 선들은 절대적인 움직임의 부재로 화면을 차단합니다. 그 순간까지 당신이 체화하고 있던 움직임만이 이 이미지로 되돌려지거나 당신에게 귀속될 수 있고, 그래서 결국당신은 정적인 이미지로부터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신다면, 이 고정된 이미지가 격동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A: 결국, 영화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진정으로 멈춰 있지 않겠죠. 이미지에 부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관점의 문제입니다.
MS: X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제목처럼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반복되고 강화되는 중심에 관한 개념과 관련된 선언으로서 말입니다.
AA: 편집이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장면들의 연속에 대한 당신의 개입은 어떤 것입니까?
MS: 제 영화들의 대부분은 매우 세심하게 계획됩니다. 만약 뭔가가 잘못되면, 저는 다시 착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예 다른 테이크를 촬영하는 것처럼요. 동시에, 제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파장>에서는 편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신이 보게 된 것은 대략적으로 제가 촬영한 것과 동일합니다. <–––>의 경우, 저는 약 2개월간 제법 많이 편집하게 되었습니다. 일정 부분이 충분히 길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테이크들을 다시 프린트했고, 그것들은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영화는 후에 추가된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요소들을 움직이는 의미 안에서는 편집 상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인 구조는 계획된 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뉴욕 아이 앤 이어 컨트롤>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더 많은 편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획 외 다른 것들을 많이 촬영했고, 그 중 일부는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AA: <파장> 외에, 다른 영화들에서 연속을 지시하는 요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MS: 예를 들어, <–––>에서는 단순히 특정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문제입니다. 서로 매우 다른 사건들이죠. 사건들 사이에 만들어질 수 있는 연결의 유형들은 서사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다양한 경우에 있어 사람들의 행위는 작용과 반작용, 상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영화의 구조에 참여합니다. 앞 뒤로 가는 것이죠.
<중심지대>와 관련하여, 이 영화의 구조는 교향곡처럼 매우 고전적입니다. 처음에 몇 가지 주제가 제시되고, 이후 변주가 이루어집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반복되는 움직임이거나, 다른 움직임과 결합된 것들입니다. 영화는 시작과 끝에서 더 많은 활동성을 보여주는 반면, 하늘이 지배적인 중간 부분에서는 움직임이 극적인 특성을 잃어버리고 실제 행성들이 움직이는 방식에 가까워지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로 설명될 수 있는 수학적이나 기하학적 구조는 없으며, 단지 카메라의 회전 움직임에서 가능한 모든 속도와 조합을 탐구하는 일련의 변주들이 있을 뿐입니다.
AA: 이 영화에서 제가 주목한 점은 줌 렌즈의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줌을 더 사용했다면 다른 변주와 조합이 가능했을 텐데요.
MS: 저는 관객이 중심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줌 움직임은 네다섯 번 정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관객이 특정 장소의 중심에 있다는 심리적 감각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줌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당신이 중심에 있다가,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하지만 이것이 더 자주 일어났다면, 줌에 대한 이 특별한 감정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줌은 중요하지만, 뭔가를 부수거나 변화시키는 요소로서 주요합니다. 영화 길이와 관련해서는, 저는 실제 시간의 감각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칭찬하듯이 말합니다: "3시간짜리 영화를 봤는데 30분처럼 느껴졌어요." 대신 저는 3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 30,000년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깁니다. 하지만 뭐 그렇게 길지는 않죠, 단 3시간일 뿐입니다.
AA: 당신의 영화들이 매우 계획적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중심지대>에서는 항상 우연성이 존재합니다. 이는 현대 예술의 주요 관심사인데요: 존 케이지나 앤디 워홀을 떠올리게 됩니다.
MS: 존 케이지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다양한 변인들을 담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만듭니다. <파장>에서, 저는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필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만 있었죠. 예를 들어, <파장>에서 여자가 라디오를 켜는 순간 들리는 소리를 무엇이든 녹음하고 싶었습니다.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녹음했던 것과 동질적으로요. 하지만 라디오를 켰을 때 존 바에즈의 Little Drummer Boy가 나왔는데, 저는 그 곡을 싫어해서 거부하고 다른 음악을 넣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외에] 어떠한 것이든 영화로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1972년 5월 5일 뉴욕에서 진행되었습니다. Mostra Internazionale del Nuovo Cinema의 Quaderno informativo No. 40, Personale di Michael Snow에 서명 없이 Intervista로 출간되었습니다(pp. 18-23).